그림일기 99

달맞이

내 어린날의 삽화 중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한 해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펼친 놀이마당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신명나게 장구를 치던 키가 껑중한 엄마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그시절의 내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지금도 보름달이 뜨면 귓가에 풍물소리가 들리는 듯해 달맞이를 나선다. 높은 산에 올라 일출을 맞는 것과는 달리 달맞이는 그저 달이 보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땅거미가 내려앉기도 전에 둥근달이 솟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뒷마당이나 다름 없는 궁동초 운동장에서 달맞이를 한다. 귓가에서는 풍물패 소리가 쟁쟁거리고 마음은 꽉찬 보름달처럼 넉넉해진다. 텅 빈 운동장에 서서 잠시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그림일기 2008.11.14

장금이

2008년 9월 8일,우리집에 새 식구가 생겼다. 이름은 장금이다. 새 식구 이름이 장금이가 되기까지, (엄마) 우리집에 '우연'은 있으니까 '필연' 어때? (두연) (대꾸도 안하고 무시해 버린다) (아빠) 두연이 동생이니까 '두리'로 해라 (두연) (고개를 사정 없이 흔든다) (엄마) 두연이 동생이면 '세연'이가 더 어울리지 (두연) 수 삼촌이 알면 기분 나쁠텐데요 (엄마) 그렇긴 하겠다 ( 막내 동생네 딸 아이 이름이 '세연'이다 ) (두연) 제가 진작에 지어놓은 이름 있어요 '장금이' 장금이가 우리집에 온지 아직 2주가 채 안됐다. 태어난지 2개월이 조금 넘었고. 장금이를 입양하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두연이가 사춘기를 맞으면서 틀에박힌 학교생활을 너무 힘들어 했는데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

그림일기 2008.09.20

살다보면

토요일밤,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독서토론 모임과 주말 과외를 받느라 밤늦게 들어온 우연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홀로 받는 주말 저녁밥상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밥상에 앉아서도 도통 기운이 없어 보인다. - 밖에서 무슨일 있었어? - 별일은 없었는데 그냥 기운이 없어요 - 그냥이 아닌거 같은데? - 정말 아무일 없었어요... 평소에 좀처럼 짜증을 모르는 형의 기분 상태가 영 아니란걸 감지한 두연,긴급 회의를 소집한다. (남편은 저녁출근을 했고) - 우리 '놈놈놈' 영화 보러 갈까요? - 그럴래 우연? -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 두연이와 난 괜시리 우연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애궂은 티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며절대 흩어져선 안될것처럼 거실에 모여 있다가 자정이 다 될 무렵에서야 아무래도 안..

그림일기 2008.07.27

토막일기

★ 분꽃을 보면 낮동안 꼭꼭 여민 꽃잎을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열고서 진한 향기를 풍겨내는 꽃,퇴근길에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피어있는 분꽃을 보면 사춘기 시절 엄마에게서 풍기는 분냄새가 싫어서 괜시리 투정부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제나 바빴던 엄마는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만 곱게 화장을 했었다.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교회를 다녔던 난 엄마에게서 풍겨오는 분냄새가 내게 주어진 일요일의 자유를앗아가는 적이라도 되는양 그렇게 싫어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은 한창때였다.직장에 다니던 엄마는 일요일이 되면 밀린 집안일과 신앙생활 하느라 평일보다 더 바빴던것 같다.그런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화장은 지치고 피곤한 삶에 활력을 주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날엔가 밤늦게 학..

그림일기 2008.07.03

살구이야기

어버이날을 맞아 친정 부모님을 뵙고 왔다.마침 앞마당에 심어놓은 화초에 물을 주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대문을 밀고 들어서는 딸을 반갑게 맞아주신다.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고 계시던 엄마는 아버지의 큰 목소리로 딸을 반기는 소리를 들었던지 내가 미처 현관에 오르기도 전에 달려 나오신다.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는 친정이건만 난 참 어지간히도 친정엘 안가는 참으로 까칠한 딸이다. 밥 다 되었으니 방에 앉아 조금만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뒤꼍으로 나가본다.앞마당이 아닌 뒤꼍에 매어둔 두 마리 개는 제 주인과 한핏줄임을 어찌 알고 짖지도 않는다.텃밭에는 갖가지 채소가 심어져 있고 새로이 씨를 뿌리려고 밭고랑을 내놓기도 해서 어느 한 곳 빈 틈이 없다.담장옆에 일렬로 도열한 호두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그림일기 2008.05.08

서울 구경

우연이와 함께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 구경을 간다. 방학이라고 해야 지난해 연말 단 하루 뿐이었다가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봄방학을 맞은 우연이가 엄마와 함께 서울대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한다. 내게 있어 우연이는 환상의 여행 파트너이다. 산행을 할때도 그렇고 여행을 할때도 그렇고 눈앞에 벌어진 험난한 상황에도 늘 엄마보다 더 용기백배 할줄 아는 멋진 녀석이다. 채 동이 트기전에 출발한 호남선 열차엔 승객들도 별로 없는데다 새벽잠 못이루고 기차를 탄 몇 안되는 승객들마저 잠에 푹 빠져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바깥 풍경도 바라볼 수 없다보니 각자 준비해간 시간 떼울거리를 가방에서 꺼낸다. 난 요즘 읽고 있는 두툼한 책을 꺼내고 우연이는 영화를 두 편이나 다운 받아온 모양이다. 헌데 이어폰이 고장났는지 ..

그림일기 2008.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