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서울 구경

연이♥ 2008. 2. 18. 11:26

 

우연이와 함께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 구경을 간다.

방학이라고 해야 지난해 연말 단 하루 뿐이었다가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봄방학을 맞은 우연이가 엄마와 함께 서울대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한다.

내게 있어 우연이는 환상의 여행 파트너이다.  산행을 할때도 그렇고 여행을 할때도 그렇고 눈앞에 벌어진 험난한 상황에도 늘 엄마보다 더 용기백배 할줄 아는

멋진 녀석이다.

 

채 동이 트기전에 출발한 호남선 열차엔 승객들도 별로 없는데다 새벽잠 못이루고 기차를 탄 몇 안되는 승객들마저 잠에 푹 빠져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바깥 풍경도 바라볼 수 없다보니 각자 준비해간 시간 떼울거리를 가방에서 꺼낸다.

난 요즘 읽고 있는 두툼한 책을 꺼내고 우연이는 영화를 두 편이나 다운 받아온 모양이다.

헌데 이어폰이 고장났는지 한쪽에서만 소리가 들린다며 영화보려고 책 한 권도 안들고 왔는데 큰일이라고 난리다.

 

평소 이어폰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난 한쪽에서라도 소리가 들리면 된거지 꼭 양쪽에서 소리가 나와야 되냐고 묻고,

까다로운 우연씨는 어떻게 영화를 한쪽 귀로만 소리를 들으며 볼 수 있냐며 그랬다간 당장 내 삶의 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그럼 음악이라도 듣지 그러냐고 했더니 음악이야말로 두 귀로 들어야지 한 귀로 들을바엔 안듣느니만 못하다며 결국 가방속에 pmp를 도로 넣어 버린다.

하지만 상냥한 우연씨는 이러한 과정에서 결코 짜증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의사 표현을 명확히 할뿐 언제나 싱글벙글 명랑쾌활이다. 

아들과의 서울구경에 들떠 전날 밤잠을 설친 나 또한 그다지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으므로 책을 덮어 버리고 날 밝기 기다려 바깥 풍경이나 보기로 한다.  

 

연이모자의 서울대 찾아가는길...

사전 정보에 의하면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보다는 낙성대 역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가는게 빠르다길래 서울대입구 역을 지나쳤더니

행여 옆사람 들릴까봐 우연이가 조용조용히 묻는다.

"서울대 지났는데 왜 안내려요?"

"응, 다음에 낙성대에서 내릴거야"

"왜 서울대 안가고 낙성대 가요?"

"낙성대가 더 좋은 학교야"

 

흠...

식상하지만 낙성대를 제대로 모르는 우연이를 충분히 당황케한 개그였다는~~~

  

 

 

 

 

 

 

서울대 후문으로 들어간 우리는 먼저 정문을 찾기로 했다.

서울대의 상징인 '샤' 앞에서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걸 시작으로 서울대 탐사(ㅎ)에 본격 돌입하겠다는 얘기다.

서울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건만 역시 내가 사는 익산보다는 훨씬 추웠다.

'샤'를 찾아 비탈길을 내려서는데 세찬 바람에 얼굴이 시려온다.

 

정문에서부터 본격 탐사를 시작한 우연이는 건물마다 죄다 카메라에 담아달라고 주문을 하질 않나,

그럴듯한 조형물이라도 눈에 띄면 어김없이 포즈를 취하며 멋지게 찍어달라고 하질 않나,

여하튼 추운줄도 모르고 뛰어노는 어린아이 마냥 신이났다.

 

하지만 내 시선은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있는 관악산 능선에 꽂혀 우연이의 주문엔 별 관심이 없다.

애초에 계획하기를 서울대를 둘러본뒤 관악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가 아들과의 여행인데 너무 내 욕심만 챙기는것 같아서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을 둘러보기로 계획을 변경한터라 관악산에 올라보고픈 미련을 쉬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그 넓은 학교를 샅샅이 탐사하고 다니다보니 장갑을 꼈음에도 불구하고 손도 시리고 다리도 아프고 설상가상으로 배가 고프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워 지던지 한걸음한걸음 떼기가 발에 쇳덩이를 하나 달고 있는듯 하다.

탐사대장 우연이에게 이제 그만 밥좀 먹으면 안될까하고 슬며시 물어보니 아쉽지만 그러자고 하여 기숙사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 한 끼를 해결했다.

물론 배가 많이 고팠던터라 양은 차지 않았지만 그래도 후식으로 뜨거운 유자차 한 잔 마시고나니 좀 살것 같았다.

 

서울대를 나와 다음 행선지인 창덕궁 가는길...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려고 하는데 우연이가 또 한말씀 하신다.

"교대가 서울교대 말하는 거였어요? 난 다른 노선으로 교대하라는 건줄 알았는데 우리 교대도 들렀다 가요"

허걱, 영문 표기를 보고선 이번엔 제대로 알아차렸다.

"교대는 오늘 우리 일정에 없으니 그냥 얼른 다른 노선으로 교대해서 창덕궁에나 가자"

 

창덕궁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다섯 곳의 궁궐 가운데 조선시대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내지는 복원되어 있고 자연과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궁이다보니 다른 궁궐처럼 자유관람이 아닌 제한관람이 실시되고 있었다.  따라서 궁궐 내에서 내맘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내가 찍고 싶은대로 사진을 찍을수도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숭례문처럼 개방만 해놓고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서 화를 입는것 보다는 우리것을 좀 더

소중히 다루고 아껴서 원형 그대로 오래도록 보존하는게 더 중요함은 말해 무엇하리.

 

 

 

 

 

 

 

 

 

 

 

 

 

  

 

 

 

  

 

 

창덕궁을 나오니 오후 네시,

용산역에서 저녁 7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려면 창경궁이나 경복궁 가운데 한 곳 만을 더 들를 수 있기에

우연이에게 어디로 갈건지 물었더니 뜻밖에도 남산엘 가자고 한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신호대기중에 우연이 눈에 남산 타워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궁궐은 초등학교 수학여행때 질리도록 돌아다녀서 이젠 그만 사양하고 싶다며 확실하게 반기를 들어버린다.

 

"그래 좋다. 남산 가는길에 숭례문 화재현장도 한 번 보자꾸나"

 

숭례문 화재 현장은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

화재 이후 날이면날마다 텔레비전에서 지겹도록 보았는데 굳이 가까이 가서 참혹한 현장을 목격할 필요까지야!

 

남산타워 가는길,

기차 시간이 다소 촉박하다보니 타워에는 오르지 말고 중간에 전망대가 있는 모양인데 그곳까지만 가자고 하니

우연이는 그래도 서울에 왔고 남산엘 올랐는데 타워에서 서울시내 조망도 안하고 어떻게 내려가냐며 한사코 타워를 고집한다. 

난 여유있게 용산역에 도착해 녀석에게 맛있는 저녁도 사먹이고 싶은데 엄마를 능가하는 기질이며 고집에는 내가 두손두발 다 들었다.

 

신이나서 껑충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우연이의 뒷모습이 춤을 추듯 경쾌하다.

타워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은 파란 하늘과는 달리 스모그로 인해 뿌옇기만 하지만 그래도 한강만큼은 푸르디 푸르러서 우연이의 고집이 고맙기까지 했다.

남산에서 세찬 바람 맞으며 일몰을 바라보고픈 마음 간절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길고 긴 계단을 내려왔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프지만 연이모자 기차타고 서울가서 구경 한 번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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