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토막일기

연이♥ 2008. 7. 3. 22:21

 

 

 

 

 

 

 

 

 

 

★ 분꽃을 보면

 

낮동안 꼭꼭 여민 꽃잎을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열고서 진한 향기를 풍겨내는 꽃,퇴근길에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피어있는 분꽃을 보면 사춘기 시절 엄마에게서 풍기는 분냄새가 싫어서 괜시리 투정부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제나 바빴던 엄마는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만 곱게 화장을 했었다.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교회를 다녔던 난 엄마에게서 풍겨오는 분냄새가 내게 주어진 일요일의 자유를앗아가는 적이라도 되는양 그렇게 싫어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은 한창때였다.직장에 다니던 엄마는 일요일이 되면 밀린 집안일과 신앙생활 하느라 평일보다 더 바빴던것 같다.그런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화장은 지치고 피곤한 삶에 활력을 주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날엔가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우연이가 그런다."집에서 엄마냄새가 나요"순간, 지난날 내 사춘기 시절 엄마의 분냄새를 극도로 싫어했던 일이 생각나 뜨끔했다."엄마냄새가 어떤건데?""글쎄요...뭐라고 꼬집어 말할수는 없지만 아무튼 엄마냄새가 났어요""화장품 냄새?""그건 아니예요. 그냥 좋은 냄새..."

 

철없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 괜시리 마음이 울컥해진다. 지금도 교회가는 날이면 곱게 화장을 한 엄마모습은 딸인 나보다도 훨씬 곱다.

 

 

 

 

★ 담배와 당근

 

매일 아침 나랑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고등학생 한 명과 같은 버스를 탄다.연이형제에 비해 키가 한참 작다보니 교복만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중학생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느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버스시간 맞추느라 뛰다시피 걷는데 내앞을 빠른 걸음으로 슥 지나치는 그 학생에게서 담배냄새가 풍겨오는 것이다.  혹시 주변에서 누군가 피운 담배연기가 날아왔나 싶어 바쁜 와중에도 주변을 둘러보지만 학생과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설마? 하면서 앞서가는 남학생의 뒤꽁무니를 유심히 살펴보니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서 슬쩍슬쩍 피우면서 걷는 것이다.  그동안 중학생처럼 어리게만 보았던 순진한 나의 안목에 어이없어하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좀전까지 손가락에 꽂혀 있던담배 대신 이번에는 당근이 들려있다.

 

'아니 저건 또 뭐야?'이내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 올라타면서도 계속 내 시선은 그 학생의 왼손에 들려있는 당근에서 떨어질줄 모르는데학생은 자리에 앉아서도 당근을 계속 먹는다.

 

그후에도 아침이면 종종 당근을 먹는 학생을 목격하곤 한다.아무래도 몸에 밴 담배냄새를 제거하는데 당근이 탁월한 효과를 내는 듯 싶다.

 

오늘 아침에는 버스가 출발할때까지 학생이 보이지 않길래 차창밖으로 살펴보니 아파트 후문을 나와 뛰어오는게 보인다.  버스기사님께 저기 학생 한 명 오니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그 와중에 이 학생은 수퍼에 가서 잔돈까지 바꿔가지고 버스를 탄다. 설마 담배를 산건 아니겠지?

 

 

 

 

 

★ 내가 염소냐?

 

올여름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에는 풋고추,깻잎,치커리,상추 등 무공해 야채가 가득 채워져 있다.절친한 선배와 나이 지긋하신 인생 대 선배분께서 주말농장에서 재배한 각종 야채를 일주일에 한두 번씩 번갈아 가져다 주는 바람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와 앞집 새댁에게 나눠주고도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평일에 혼자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강된장과 고추장 참기름에 각종 야채 듬뿍 넣고 비벼먹는다.엊그제는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도 혼자 먹을때처럼 그렇게 비벼서 줬더니 야채가 너무 많이 들어갔던지 내가 무슨 염소냐며 퉁을 놓는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들이 시험기간이어서 모처럼 발코니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이 무공해 야채가 인기만점이었다.비록 구멍이 송송 뚫렸지만 깻잎이며 치커리가 향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며 평소 야채 잘 안먹는 아이들마저도 참 맛있다고 한 마디씩 한다.모처럼 온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것만도 내겐 즐거움인데 모두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손수 가꾼 채소인양 뿌듯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냉장고 야채실에 가득 들어있는 무공해 야채들을 생각하면 늘어졌던 몸에 생기가 돈다.선배들의 마음이 담긴 야채만 먹고 사는 요즘의 내게 누군가 염소라 부른다면 기꺼이 염소가 되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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