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자산

연이♥ 2016. 3. 13. 19:46

 

 

 

 

 

 

 

 

 

석 달만의 외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내가슴에도

봄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날..

 

 

  흑산에는 상록수가 밀생했다. 동백숲과 소나무숲은 폭양속에 힘이 뻗쳐서 검게 빛났다. 소금기에 단련된 잎들이 번들거렸고,

바람이 불면 숲은 뒤척이며 수런거렸다. 멀리서 보면 햇빛이 좋은 날 섬은 먹빛으로 번쩍거렸고 흐린날에는 시커먼 바윗덩이로

떠 있었다.

 

 원양을 가는 배는 흑산도와 가거도 사이로 물길을 잡았다. 흑산은 마지막 항로 지표였다. 해안 단애가 섬을 빙 둘러 막았고

파도가 사나운 날 멀리 가는 배들은 흑산에 접안하지 못했다. 원양으로 가는 배들에게 흑산은 마지막 섬이었고, 하얀 바다와

잇닿은 검은 바다의 섬이었다. 흑산의 검을 흑黑자가 단 한 개의 무서운 글자로 이 세상을 격절시키고 있었다. 섬에 처음

들어왔을때, 정약전은 그렇게 느꼈다. 백성의 피를 빨고 기름을 짜고 뼈를 바수고 살점을 바르고 껍질을 벗기는 풍습은

육지나 대처와 다르지 않았으나 태어나서 품 팔아서 먹고 또 죽는 방식은 달랐다. 박민剝民의 제도와 방식이 같다 하더라도

섬은 아득히 멀어서 간여할 자가 없었고 물과 바람에 얽힌 사슬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정약전은 흑산의 검을 흑 자가 무서

웠으나, 무서움은 섬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흑 자의 무서움은 당대 전체에 대한 무서움과 같았다. 정약전은 그 무서움의

안쪽을 스스로 들여다보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흔적이 거기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도 했다. 돌아갈 곳이 없이,

모두 무서운 세상인데, 그래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고향 마재 마을 개울의 게와 흑산 개울의 민물

게가 모양새가 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정약전은 스스로에게 설명해주었다.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정약전은 창대를 불러 앉히고 그 두려움을 말하려는데, 말은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 나는 흑산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

 정약전은 종이에 검을 자玆를 써서 창대에게 보여주었다. 창대가 고개를 들었다.

- 같은 뜻일 터인데.......

- 같지 않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혹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이제,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 바꾸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 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玆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 그쪽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창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약전은 자산 바다의 물고기들의 종류와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적어나갔다.

글이 물고기를 몰아가지 못했고, 물고기가 글을 끌고 나갔다. 끌려가던 글이 물고기와 나란히 갔다.

 

                                              ..김훈 장편소설 <黑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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