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눈이 내리는 날에는 왕궁리에 가야 한다

연이♥ 2009. 12. 20. 20:34

 

양귀자 소설 <원미동 사람들>에 나오는 임씨는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고 말한다

소설속 임씨처럼 떼인 돈도 없는데다 아직은 첫눈을 기다릴줄 아는 낭만이 남아 있는 나는 비가 아닌 눈이 내리는 날에는 왕궁리에 가야 한다

 

그곳에 가면

땅 밑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땅 위로 우뚝 솟아 장엄하기 그지 없는 탑이 있어

홀로 찾아도 외롭지 않고 사계절 어느때 찾아도 변함이 없지만

눈이 내리는 날에는 더 그립고 그리워 나는 왕궁리에 가야 한다

 

 

 

 

 

 

 

 

 

밤사이,

어제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어제는 나홀로,

오늘은 단잠에 빠져 있는 우연군을 깨워 집을 나선다

추하고 아름다운 것을 구별하지 않고 온통 하얀눈으로 뒤덮인 그 환상적인 풍경을 나홀로 보기엔 너무나 아깝다

 

왕궁리에 가는 동안 눈이 그치고 금세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한결 누그러진 날씨에 행여 눈이 다 녹아버릴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왕궁리유적전시관 마당에 도착하니 누군가 나보다 먼저 도착해 하얀 눈이 빚어낸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전시관 학예계장님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에 활짝핀 눈꽃 사진을 감탄사 연발하며 찍고 있는데

아닌게아니라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시고 먼저 인사를 건네신다

 

어제는 눈도 흡족할만큼 내리지 않은데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전시관에 들어가 몸을 녹일까 잠시 생각은 했지만 탑만 만나보고 왔었다

오늘은 전시관 개관 이후 두 번째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는 '1965 왕궁리5층석탑 해체보수'편의 귀한 자료 사진 감상과 더불어 보충 설명도 듣고,

무엇보다 학예계장님께서 손수 타주신 따뜻한 커피가 있어 잠시나마 마음이 넉넉해지는 시간이었다

 

내년에는 국립전주박물관에 있는 왕궁탑 해체시에 발견된 사리장엄 일체의 유물을 왕궁리 유적전시관에서 꼭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왕궁리에서 보내고 미륵사지에 도착할 즈음엔 또 다시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오늘 날씨가 계속 변덕이 심한터라 산에 오르는 동안에 다시 하늘이 개일지 모른다는 계산으로 등산을 먼저 하기로 했다

눈만 보면 어린애마냥 좋아라하는 우연군은 산을 오르면서 장갑도 벗어버린채 눈을 뭉쳐 갖가지 형상의 조각을 하느라 바쁘더니

정상에 올라서는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 맛이 최고라며 아이스케키를 두 개나 먹는다

 

 

 

 

 

미륵사지에 내려오니 어느새 내리던 눈이 그치고 또 다시 햇볕쨍쨍이다

많이 포근해진 날씨는 그 많던 눈을 금세 다 녹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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