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

연이♥ 2009. 6. 27. 21:49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특별전

 ◆ 2009.6.27 ~ 7.26

 

 

 

* 바람소리님께서 무심코 찍은 사진 속에서 연이가 캔커피를 마시며 걸어가고 있네요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1층 내부에 있는 심주석 해체과정에서 무려 140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사리장엄 일체가 발견 되었는데,

드디어 백제시대의 찬란한 유물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처음 접한건 며칠전 퇴근길에 대로변 육교에 걸린 현수막을 통해서다. 

이번 놀토엔 덕유산 산행을 나서보리라 계획했었는데 육교에 걸린 현수막을 발견하는 순간, 지난 1월에 인터넷을 통해 사리장엄 출토 소식을 접했을때

만큼이나 들뜬 마음은 산행 계획을 언제 세웠냐는 듯 깡그리 잊어버리게 만든다.

 

국보중의 국보라는 사리장엄을 과연 어디에서 전시를 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쯤에나 일반에 공개가 될 것인가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반갑게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공개가 된 것이다. 

 

 

 

 

 

오늘, 미륵사지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은데다 전국에서 몰려든 엄청난 인파와 폭염으로 개막식 테이프 컷팅 전까지 진행된 공개행사가 너무나 지루하다.

이를 배려했음인지 늘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다니는 훤칠한 키의 익산시장 께서는 축사를 생략하는 센스를 보여주신다.  입구에서 나눠준 모자와 부채가

없었더라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텐데 행사 준비 관계자들의 세심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 지방 국회의원을 비롯한 도지사 등은 이번 사리장엄 출토를 계기로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내놓는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리장엄은 물론 국립 전주박물관에 있는 왕궁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국보제123호) 등의 유물도 익산으로 모셔올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도 꼭 그리되기를 희망한다.

 

  

 

테이프 컷팅을 마치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너무도 많은 인파가 몰리다보니 VIP들만 먼저 입장을 시키겠다고 한다.

기자도 아니면서 행사내내 앞쪽에서 얼쩡대던 나는 다행이 VIP 그룹에 휩쓸려 가장 먼저 전시관 안으로 입장하는 행운을 얻었다.

 

 

630여점의 구슬이 수습되었는데 그 가운데 녹색계통의 유리구슬이 580여점 이라고 한다.

 

 

은제관식 

 

 

금제사리봉안기

 

가만히 생각하건대,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

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 (요잡,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금제사리봉안기 원문 해석..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인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발원문 형식의 사리봉안기 출토로 인해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서동요' 속의 주인공 백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국경을 초월한 러브스토리는 설화로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을

남겨두고 있다.

 

얼마전, 사리봉안기 내용과 관련한 학회에서는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어느 학자는 '그래도 선화공주를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라고 말해 모두를 웃게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금제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그동안 사진으로만 본 금제사리호는 생각보다 그 크기가 아주 작았다.

물론 높이 13cm, 어깨 폭 7.7cm를 자로 재가며 어느정도 일거라는 추측을 전혀 안한건 아니지만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생각보다 더 작다.

사리외호는 엄지와 검지를 벌린 정도의 크기이고, 사리내호는 검지손가락 크기 정도이다. 이토록 작은 병에 그토록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장식을

새겨넣은 백제 예술혼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사리외호와 내호는 그 문양이나 모양이 거의 똑같고 사리내호 내부에는 사리와 함께 작은 유리파편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사리를 담은 유리병이 사리내호 안에 따로 들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사리내호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사리장엄 일체가 출토되고도 석달 가까이 지난 4월초에 처음 알려졌다.

순금으로 된 사리내호에서는 사리 12과와 다량의 구슬이 수습되었다. 사리외호의 뛰어난 아름다움 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받았건만 마치 태아처럼 

사리외호 속에 들어있던 사리내호의 발견은 또 한 번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길 없었다.  

 

 

진신사리 (사진, 바람소리님)

 

 

 

진신사리 이운식 행사 가운데 바라춤 (사진, 바람소리님)

 

 

 

타시도에서 찾아오는 관람객 편의를 위해 전시기간 동안 익산역에서 미륵사지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사리장엄을 만난다는 설렘과 흥분과는 달리 너무도 무더운 날씨와 너무도 많은 인파에 치여 온전하게 관람도 하지 못한채 다음에

한 번 더 다녀오리라 맘먹고 미륵사지를 나와 택시를 타고 오랜만에 왕궁리엘 갔다.  미륵사지와는 달리 왕궁리 전시관은 무척이나 한가로워 더위

마저 한층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마침 전시관에는 학예계장님이 계셔서 인사를 드렸더니 왕궁리 유적전시관 도록을 몇 권 챙겨 주신다.

 

 

 

 

종일토록 우울한 하루를 보내고 해질무렵에서야 길을 나섰던 2년전 칠월칠석날,

왕궁탑 너머로 찬란하게 지던 저녁노을은 나를 무아지경속으로 빠트려 단번에 우울을 걷어갔으며, 소중한 인연의 고리가 되어주었다.

 

 

  

 

 

왕궁리에 갔는데 왕궁탑에 인사는 드리고 와야하지 않겠는가!

구름이 좋아 사진 한 컷을 찍고 벚나무 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데 연세 지긋하신 분께서 사다리까지 챙겨 사진을 찍으러 오신다.

요즘은 DSLR이 보편화 되면서 정년퇴임후에 취미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시는 분들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사진을 찍다보면 그만큼 부지런해야 하고 걷기도 많이 걸어야하니 노년기 취미생활로는 그만일 듯 싶다.

 

더위를 먹었음인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두통이 덜컥 찾아와 버렸지만,

137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엄청난 보물을 만나고 왔다는 설렘으로 오늘밤 쉬 잠들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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