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흙길 예찬

연이♥ 2009. 11. 28. 11:14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다.  둘레가 4킬로쯤 되는, 기다랗게 활처럼 휜 자연호수이다.  교통량이 많은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각(角) 안에 위치해 있는데도

내려앉아 있어서 그런지 통과하는 차량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삼각형의 나머지 한 변은 아파트단지다.  그래서 그 호수는 마치 그 아파트 주민만을 위해서 숨어

있는, 또는 누워 있는 미녀처럼 보인다.  지척에 그런 호수가 있는데도 이리로 이사 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지냈다.  거기를 산책로로 정하고 거의 매일 다닌

지는 몇 년 안 된다.  그 누군가가 세심하게 가꾸고 있는 듯 꽃 피는 나무들과 야생초를 적절하게 배치해 한겨울 빼고는 꽃이 그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지

자치 단체일 것이다.  한강변의 기막히게 수려한 곳마다 음식점 아니면 러브호텔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지방 관청을 욕하다가도 거기만

면 욕하던 입으로 칭찬을 하게 된다.  욕보다는 칭찬이 더 기분 좋은 건 듣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숨어 있는 호수의 또 하나의 미덕은 둘레가 흙길과 농지로 돼 있다는 데 있다.  동네가 한적하고 골목이 많은 시골동네라 한 바퀴 도는 것도 충분한 운동이 되는

데도 차가 많이 다니는 지방도로를 건너는 불편을 무릅쓰고까지 그리로 가는 것은 순전히 흙길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시골마을인데도 골목까지 포장돼 있다. 늙은

관절은 흙길과 시멘트 길을 민감하게 구별한다.  똑같은 십리 길이라도 시멘트 길과 흙길은 걷고 난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  쾌적하지 않고 피곤하다. 긴장하지도 방

심하지도 않고 나무처럼 꼿꼿하게 땅과 직각을 이루며 흙길을 걸으면서 흙이 뿜어 올린 온갖 아름다운 것들, 나무,꽃나무,들풀,물풀,주위에 있는 비닐하우스나 주말

농장에서 풍겨오는 채소와 거름냄새를 맡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처음으로 직립해서 두 발로 땅을 박차던 태초의 인간의 기쁨과 자존이 이러했을까.  아침마다 산

에 오르던 걸 걷기로 바꾼 것도 직립의 기쁨 때문인 것 같다.  나이 때문이겠지만 오르막길에선 자주 숨을 몰아쉬게 되고 지팡이를 필요로 하거나 엉금엉금 길 때도

있는 게 싫다.  긴장을 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얕은 산도 정상이 있어서 거기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매일 하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그

것 또한 나이 탓이겠지만.

 

  흙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느끼기만 하면 된다.  요샌 한창 땅기운이 왕성할 때다.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산천초목을 통해 지상으로 분출

고 있다. 흙 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만큼은 아니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힘이 비록

에게 이르러 잎이나 꽃이 되어 피어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 풍진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어찌 미소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땅기운과의 이런

안한 친화감에 힘입어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된다.  이렇게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동안만 살게 하소서, 라고.  허나 이렇게 엄청난 욕심이 어찌

도가 되겠는가, 응석이지.

 

 

                                                                                                 ..박완서 산문집 「호미」 중에서..

 

 

사진 : 내고향 장수 장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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