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컨닝이야기

연이♥ 2009. 6. 15. 15:26

 

 

 

 요즘도 난 가끔 시험보는 꿈을 꾸곤 한다.

대개는 고3으로 되돌아가 수학시험지를 받아 들고 한 문제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시험지 걷으라는 선생님 목소리에 놀라 허둥대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인데,  얼마전에는 어떻게든 한 문제라도 답을 써서 제출하려고 컨닝을 하다 걸리는 바람에 시

험지를 뺏겨버려 쩔쩔매다가 잠에서 깬적도 있다.

 

학업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난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 것 같지도 않은데 어째서 시험

무관한 이나이에도 그렇듯 시험 보는 악몽에 시달리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인 수학 시험만 주야장천 보느냐

다.

 

나름 꿈해몽을 즐기는 나로선 꿈 해석 이론이라면 프로이트 보다는 융의 손을 들어주는 편인데, 한 달이 멀다하고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

고서 쩔쩔매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다보니 이젠 융의 손을 자신있게 들어줄 수도 없을 것 같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컨닝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21세기 첨단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학생들은 어떤 방법으로 컨닝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험이란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컨닝 또한 자연스레 생겨났을 터, 옛날 사람들은 또 어떻게 컨닝을 했을지 몹시 궁금하지 않은가?

 

 

 

 루쉰은 「납함」의 <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전에 4년여 동안 거의 매일 전당포와 약국을 드나들었다.........상당히 여유있는 생활을 하다가 자기 밑바

생활로 떨어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의 가정이 '상당히 여유있는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밑바닥 생활로 떨진' 것은 조부 개부공이 감옥살이를

게된 사건 때문인데 周作人의 <루의 故家>에 의하면, 개부공이 내각중서(서기관)재임중이던 1893년 친상

을 당하여 휴직하고 귀향해 있을 때였다.

 

 바로 3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향시가 있기 한 해 전,  수험생이던 자신의 아들(루쉰의 부친)과 친자제 등 총

다섯명의 부정시험을 부탁하기 위해 은 1만냥의 약속어음을 건네는 과정에서 일못되어 사형 판결까지 받았

다.  다행이 사면을 받아 7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고 출옥 하였지만 옥후 4년만에 세상을 뜨기까지 두 번 다시 관

복귀할 수 없었다 한다.

 

 隋문제때 제정된 과거는 삼국시대 위나라 이후 실시되어오던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가운데 공개 시험을 통해 실력을 겨뤄 관료 후보자를 사회 각층에서 직접 선발할 수 있도록 한 획기적제도였

다. 

 

그 이래로 각 왕조에서 시행된 과거 시험은 청대에 이르러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다.  청대의 과거 험은 원

으로 3년에 한번 시행되고, 예비 시험은 그 전년도에 시행되었다.

 

 원시 급제자는 소속 부,현에 설치된 관학의 생원(수재), 즉 학생이 되어 비로소 과거의 제 1단계'향시鄕試'

시험 자격을 얻는다.  향시는 3년에 한번 봄에 시행되고, 급제자는 그 해 가을 도성행되는 '회시會試'

보며, 회시의 급제자는 황제의 어전에서 시행되는 '전시殿試'(급제열을 정함)를 거쳐 '진사'가 된다.

 

 사서오경을 완벽하게 암기해야 하는 이 몇 단계의 시험을 통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모든

백성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유년 시절부터 수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혜택받은 자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 한정된 사중에서 예비 시험인 원시에 급제하여 수재가 되는 사람은 수험자의 2%이하, 향시를 거쳐 거

이 되는 사람은 수험자의 5% 이하, 전시에 급제하여 떳떳하게 진사가 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험자의 5%

이하로 정해져 있었다.  이쯤되면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좁은 문을 통과하려는 기상천외한 부정 행위 역시 속출했는데, 예컨대 목면 속옷의 한 쪽

면에 깨알만큼 작은 글씨로 사서 오경을 빽빽히 써넣은 부정 행위용 속옷 같은 것은 지금도 베이징 고궁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정도의 방법은 유치해서 부정 행위 축에도 끼지 못한다.  정말로 공을 들인 것으로는, 남색의 속옷에

오징어 먹물로 글자를 써넣고 그 위에 진흙을 붙인 다음 수험장의 개인 칸막이 방에 들어가서 진흙을 비벼 떼어

내면 글자가 드러났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져 버리도록 한 방법 등도 있었다.

 

 이와 같은 부정 행위들은 '협대挾帶(가지고 들어감)'라고 불렀다.  협대는 당시 과거 시험이 3일에 걸쳐 시되

고, 수험장의 구조가 칸막이 방이 줄지어 있고 수험자 각각에게 그러한 방을 한 칸씩 할당해주는 형식으로 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오늘날 우리들도 흔히 보게되는 부정행위용 쪽지도 사용되었다.

 

 명대 풍몽룡馮夢龍의 <고금담개>(권36,과거폐지)에는 "옛날에는 얇은 종이에 문장을 쓰고 이것을 둥글게 말아

구슬로 만들어 '지구紙球'라고 부르고 공공연하게 팔았다" 고 하고, 나아가 "지금 '승두본蠅頭本'(파리 대가리처

럼 글씨를 작게 써놓은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그 잔재이다" 고 하고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써서 전하고

있다.

 

  1591년 남쪽 시험장에서 한 사람이 쪽지를 가지고 들어가다 발각 되었다.  쪽지를 기름 종이에 말아 실로 단단

히 묶고 그것을 항문 속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쪽지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성행했기 때문에 험자의

옷을 완전히 벗겨 나체 상태에서 항문 속까지 조사할때도 있었). 

 

그 남자의 항문에 실이 늘어뜨려져 있어 담당자가 그 실 끝을 잡아당겼더니 내용물이 스르르 빠져 나왔다.  수험

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수험자를 지목하며 그 사람이 버린 것이라고 발뺌하려 하였다.  그러자 앞에 있던 수험자

가 " 내가 버렸다 치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멋들어지게 이 사람의 항문에 명중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궁둥이를

쳐들어 올리고서 내가 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을리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라고 말하자 시험 감독관들도 웃음

을 터뜨렸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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