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내가 살아 보니까

연이♥ 2009. 5. 19. 14:31

 

          

 

 

명품 핸드백에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는 어느 젊은 여자와의 인터뷰도 있었다.  방에는 온갖 명품 핸드백이 색깔별, 모양별로 가득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에서 발행하는 명품에 관한 잡지를 구독해 가면서 새로 나온 디자인을 구입한다고 했다.  최하 50만 원짜리부터 500만 원까지

하는 핸드백도 있었다.  왜 굳이 명품을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져요.  저를 쳐다보는......"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적이 놀랐다.  단지 다른 사람의 눈길을 느끼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다니, 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덕에 누구나

다 쳐다보는지라 남의 시선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 여자는 그 시선 때문에 그 많은 노력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부러워서이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불쌍해서라고 하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우산 하나가 살이 빠져 너덜거렸는데 그 우산이 다른 우산에 비해 컸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는 꼭 그걸 쓰셨다.

업혀 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게다가 너덜거리는 우산까지.....그래서 비 오는 날은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때 내가 찢어진 우산을 쓰고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찢어진

우산이든 멀쩡한 우산이든 비 오는 날에도 빼먹지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

이라는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었을 수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해봤자 사

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궤변 말라고 욕이나 먹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 보니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

내 인생을 잘게 조각내어 조금씩 도랑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겉모습, 그러니까 어떻게 생기고 어떤 옷을 입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할 때 코웃음을 쳤다.

자기들이 돈 없고 못생기고 능력이 없으니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 그렇다.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몸은 쭈글쭈글 늙어 가고 살은 늘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몸으로 살아 내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 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 장영희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

하늘,바람,햇살,반짝이는 나뭇잎...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마냥 싱그러운 오월에,
한 세상 참으로 당당하게 씩씩하게 살다 희망만을 남겨둔채
별이 되어 떠난 고 장영희 교수께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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