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여보, 나좀 도와줘

연이♥ 2009. 6. 5. 10:30

         

 

                                                                        <소통> 풀꽃화가 이현섭님 그림

 

 

 내 아내 양숙 씨는 고향 진영의 한 마을에서 같이 자란 사이다.  71년 제대를 하고 돌아와 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부산에 취직을 해

있던 양숙 씨가 마을에 와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몸이 불편해 병구완차 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가끔 만나면 마음이 설레곤 했던 처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땐 워낙 콧대가 높아 말도 제대로 붙여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양숙 씨를 제대 후 고향 마을에서 다시 만난 것이

다.  그리고 고시 공부의 와중에서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책을 빌려주고 받고 하다가 나중에는 자주 만나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랫 동안

시치미뚝 떼고 딴청을 부렸다.  거의 1년간을 그렇게 나의 애를 먹인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처음 그렇게 힘이 들 때는 아내의 콧대를 원망했으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오히려 일이 안 풀렸던 것같다. 

아내를 음 몇 번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결혼해 달라고 졸라댔으니, 일이 잘될 턱이 없었다.  지금 다시 아내와 연애하라면, 결혼 따위

말은 입밖에내지 않고 오히려 아내 쪽에서 결혼하자고 조르도록 할 수 있을 텐데........

 

 우린 그래도 남들은 흔히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다.  몇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

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마치 동화 속 세계 같은 그 길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말하곤 했다.

 

 나는 아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알았었다. 그러나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나의 주인이 되어 버렸고, 주인으로 군림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꿈을 쫓던 그때의

처녀 양숙 씨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훈육 주임을 닮았다고나 할까.......

 

연애를 한창 하던 시절의 기억으로 잊지 못할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동네 앞 들판 건너 산기슭 토담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여름이 끝날 무렵이라 덮고잘 담요를 집에서 갖고 나왔었다.  그때 마침 양숙 씨를 만나 그날도 둑길을 함께 걸었다.  그런데 그 모습

가 보았는지, 무현이와 양숙이는 담요를 갖고 다니면서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져 변명도 하지 못하고 망신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는 2년 가까이를 커피 한 잔 값 안 들이고 순전히 맨입으로 연애를 했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다.  아내에

이런저런 구박을 받다 보면 아내가 마귀 할멈처럼 미워지다가도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흐뭇해진다.

 

 고향에는 아직도 그 둑길이 그대로 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나는 아내와 함께 그때의 기분을 내보곤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좋은 둑길을 요즘 청년들이 로 이용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하기는 이젠 농촌에 그 둑길을 걸을 청년들이 남아 있지도 않지만.......

 

 

 

                                                                         ..노무현 고백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 중에서...

 

  

 

 

 

책을 읽는 내내...

당신의 맑고도 깊은 울림이 있는 경상도 억양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 음악은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운데 '가브리엘의 오보에' 입니다

* <미션>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여서 여러차례 보았는데 노짱께서도 생전에 좋아했던 영화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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