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산골 아이

연이♥ 2009. 6. 19. 15:34

 

 

 

 

 눈이 오련다.  꼭 오늘밤 안으로 첫눈이 올 것만 같다. 

이제 바람만 자면 곧 눈이 내리리라. 정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산골 아이는 화로에서 도토리를 새로 꺼내면서, 이제 눈이 내려 눈 속에 도토리를 묻었다 먹으면 덜 아리고 덜 떫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자 아이는 지난해 눈싸

움을 하다가 증손이한테 면상을 맞고 운 부끄러움이 생각난다.  아찔하여 얼굴을 돌린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발아래 흰 눈을 붉게 물들이는 게 제 코피인 것을 알자 그

만 으아하고 울어버린 게 안됐다.  올해는 아무리 면상을 맞아 코피를 흘린대도 울지 않으리라.  아니 올해는 이편에서 증손이를 맞혀 울려주리라.  어서 눈이 왔으면

좋겠다.

 

 그새 바람이 좀 잔 듯하다.  혹 그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고 아이는 문을 열어본다.  그러자 잔 듯하던 바깥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된바

람이 몰려든다.

 

"문은 뭘 할라구 벌꺽하믄 여니?"

하고 어머니가 꾸짖듯 말하고 다림질감에 떨어진 재를 훅훅 불어낸다.

아이는 문을 닫으면서 혼잣말로,

"아직 눈은 안 오눈."

한다.

"개처럼 눈 오는 건 뭘."

어머니의 말에, 다림질을 잡아주던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눈이라는 말만은 알아들은 듯,

"눈 오니?"

하고 흐린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본다.

"아니."

하고 아이는 할머니가 알아듣도록 크게 대답한다.

"너이 아바진디는 왜 상게 안오니, 또 당(장)에서 술추렴을 하는게디."

하는 할머니의 역정 섞인 걱정에, 아이는 참말 눈이 내리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와야 할 걸 느낀다.

 

 참 아버지는 여태 왜 안 돌아오는지 모르겠다.  몇 죽 안 되는 짚세기를 여태 못 팔 리는 없다.  혹 장꾼에게 한 켤레 한 켤레 못 팔겠으면 그 큰 돼지를 그려 붙인 돼지

표 집에다 좀 싸게라도 밀어 맡기고 오면 그만일 터인데, 할머니 말대로 장거리에서 누구를 만나 술추렴을 하느라고 늦어지는가 보다.  그러지 않아도 겨울만 되면 허

리가 결리는 아버지가 오늘 같은 날 늦어지면 어쩌나.  벌써 몇 해 전 겨울 일이다.  타작마당에서 여느 때처럼 조 한 섬을 쉽게 져 달구지에 올려놓다가 그만 발밑 얼

음판에 미끄러져 조섬에 깔린 일이 있은 후부터 겨울철만 접어들면 허리증이 도지곤 하는 아버지.  그리고 또 해마다 술이 늘어가는 아버지.  좌우간 여느 때는 아무렇

더라도 오늘같이 눈이 온다든할 날은 일찍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밖은 아직 이따금 바람이 휘익 몰려와 수수깡 바자를 울린다.

"얘, 등잔 심지 좀 돋과라, 어둡다."

하고 할머니가 흐린 눈을 들어 등잔불을 바라본다.

 

 아이는 북어 알에선가 북어 이리에서 짠다는 애기름이 떨어져 못 먹은 뒤로 할머니의 눈은 더 어두워져서 그렇지, 등잔 심지가 낮아 그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등

잔 가로 가 심지를 조금 돋우는 체한다.  그래도 한결 밝아진다.  그리고 밝으니까 한결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놓이는 것 같아 좋다.

 

"얘, 심질 좀더 돋과라."

하고 할머니가 이번에는 다림질감만 들여다보며 말한다.

아이는 또 이번에는 심지를 한껏 돋운다.

"얘, 웬 심질 그르케 돋구니?"

하고 어머니가 꾸짖는다.

아이는 등잔의 심지를 낮춘다.

"너이 아바진디는 정말 왜 상게 안 오는디 모르갔다."

하는 할머니 말에 이어서 어머니가 아이 쪽을 한 번 돌아보며,

"넌 또 웬 도토릴 그르케 먹니, 어서 자기나 해라."

한다.

 

 가난한 산골 아이는 화로에서 도토리를 골라내며 검게 그을린 얼굴을 붉혀가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 자지 않으리라.  그러는 아

이는 왜 아직 아버지가 안 돌아오는지 모르겠다는 할머니도, 언제든지 할머니 앞에서는 아버지의 말을 하지 않는 어머니도, 자기처럼은 아버지 걱정을 않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

 

 도토리 맛도 별로 없다.  등잔불이 아까보다 더 어두운 것 같은데에 또 마음이 쓰인다.  이렇게 등잔불이 어둡고, 또 이렇게 따스한 이불속에서는 잠이 쉬 들 것 같아

안됐다.

 

 아이는 어머니보다도 할머니에게 묻듯이,

"해 있어 당에서 떠났으믄 지금 어디쯤 왔을까?"

했으나 할머니는 못 들은 듯 잡은 다림질감만 들여다본다.

다시 더 큰 소리로 물을까 하는데 할머니가,

"산막골에나 왔을까."

한다.

산막골이라면 아직 여기서 한 오 리 가까이 된다.

"너이 아바진디는 해 있어 댕기디 않구 원."

하고 할머니가 역시 역정 섞인 걱정을 한다.

 

 산막골이라는 데가 예서 장까지 가는 사이 제일 험한 곳이다.  늘 범이 떠나지 않는다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골짜기. 아이는 한동네 반수 할아버지의 일이 떠오른

다.  반수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인데, 양주가 산막골 근처에 밭김을 매러 갔다.  단 양주에 갓난아기 하나뿐이라, 애는 밭둑에 재워놓고 김을 매나갔다.  낮이 가까웠을

때 애가 배가 고픈지 깨어 울어댔다.  양주는 이제 매던 이랑이나 마저 매고 점심도 먹을 겸 애 젖도 먹이리라 하고 바삐 손을 놀렸다.  한데 갑자기 애 울음소리가 뚝

그치기에 돌아다보니 난데없는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자기네의 애를 몰고 산막골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반수 할아버지는 눈이 뒤집혀 쥐고 있던 호미 하

나만을 들고 아내가 붙들 새도 없이 호랑이의 뒤를 쫓아 올라갔다.

 

 반수 할아버지가 호랑이를 쫓아 굴을 찾아 들어갔을 때에는 마침 호랑이는 어린애를 앞발로 어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러 사람의 혼을 뽑고야 잡아먹는다는 말대로. 

이것을 본 반수 할아버지는 다가들어가면서 호랑이의 잔허리를 끌어안았다.  여기에 놀란 호랑이가 그만 으엉 소리와 함께 빠져 달아나면서 똥을 갈겼다.  이것이 혼

똥인 것이다.  이 혼이 나 갈긴 뜨거운 혼똥이 마침 엎어진 반수 할아버지 머리에 철썩 떨어졌다.

 

 반수 할아버지 마누라의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쟁기를 하나씩 들고 고함을 치면서 굴까지 달려갔을 때에는 반수 할아버지가 애를 안고 굴에서 나오는 때였

다.  애도 아무 일 없고 반수 할아버지도 아무 일 없었다.  그저 반수 할아버지의 머리만이 호랑이의 뜨거운 혼똥에 익어 껍질이 벗겨졌을 뿐이었다.

 

 지금도 반수 할아버지는 머리엔 완전히 머리털 한 오라기 없는 대머리로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으뜸 되도록 살아 있다.  그때의 애도 지금은 영감이 되어 손자를 둘이

나 보았고.

 

 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온다.  정말 산막골을 무사히 지나줬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 자지 않으리라. 

 

 어머니가 문을 열고 다리미를 밖으로 내대고 재를 까분다.  재가 날아나는 어둠 속에 희끗희끗 날리는 것이 보였다.  눈이었다.  어느새 정말 첫눈이 내리는 것이다. 

아이는 어서 아버지가 눈을 털며 들어서기만 해줬으면 눈이 오니 얼마나 좋을까 한다.

 

 아버지는 지금 눈을 맞으면서 돌아오리라.  끝없이 내리는 눈, 아이는 눈을 감으면 함박눈으로 쏟아지는 눈 때문에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분명치가 않다.  졸립다.  자

서는 안 된다.  눈발 속에 분명치가 않은 아버지를 찾다가, 아버지가 눈발 속에 가려지고 말면서, 아이는 종내 잠이 들고 만다.

 

 아이는 눈발 속이 아닌 우거진 소나무와 잡목 새에 아버지를 자꾸만 잃는다.  아버지 따라 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아버지는 장에서 마신 술 때문에 비틀걸음이

다.  명태 한 쾌를 빈 자루에 넣어 멘 아버지의 등이 무던히도 굽었다.  허리증이 더한가 보다.  아이는 천천히 걷는 자기도 못 따라오는 아버지를 잃지 않으려고 자꾸

돌아본다.

 

 한 번 돌아다보니까 아버지가 없다.  아무리 소나무와 잡목 새를 자세히 살펴봐도 없다.  그러는데 저기 산골짜기로 백호 한 마리가 자기 아버지를 몰고 올라가는 것

이 아닌가.  아이는 눈이 뒤집힌다.  그리고 백호의 뒤를 따라 올라간다.  반수 할아버지는 호미라도 쥐었지만 자기는 맨손으로.  그렇지만 내 저놈의 호랑이를 잡아 메

치고 아버지를 빼앗고야 말리라.

 

 산막골에 우거졌던 소나무와 잡목이 어느새 그만 눈발이 돼버린다.  그리고 백호란 놈이 앞서 눈발 속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발자국을 찾아가리라.  작년 겨울 동

네 돼지 새끼 물어갔을 때 내고 간 발자국을 보아 아이는 호랑이 발자국을 잘 안다.  한데 난데없는 눈덩이가 날아와 면상을 맞힌다.  증손이다.  붉은 코피가 이번에도

흰 눈에 떨어진다.  눈물이 난다.  그러나 울어서는 못쓴다.

 

 그냥 호랑이의 발자국을 찾아 올라가니까, 굴이다.  굴속에서는 정말 호랑이가 앞발로 아버지를 어르고 있다.  아이는 전에 반수 할아버지가 한 듯이 다가들어가면서

백호의 잔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랬더니, 이놈의 백호가 또 혼이 나 혼똥을 갈긴다.  꼭 머리에 떨어진다.  뜨겁다.  아무러면 내가 널 놔줄 줄 아니?  네 허리 동강이를

끊어버리고야 말겠다.  그냥 호랑이의 허리를 죄어 안는다.  백호는 죽겠다고 으르렁으엉 으르렁으엉 운다.  속히 동네 사람들이 백호 잡은 걸 봐줬으면 좋겠다.

 

 백호는 그냥 운다.  한 번 더 안은 팔을 죄니까 백호의 허리가 똑 끊어진다.  깜짝 깬다.

 

 막 깜깜이다.  어느새 돌아와 누웠는지 아이의 옆에는 아버지가 잠들어, 그르렁후우 그르렁후우 코를 골고 있다.

 

 아, 마음이 놓인다.  이젠 아주 자야지.  그러는데 불현듯 무섬증이 난다.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꿈속의 호랑이 울음처럼 무섭다.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 새새 바깥

수수깡 바자의 눈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소리가 다 무섭다.  이불을 땀에 젖은 머리 위까지 쓴다.  요에서 굴러 떨어지는 도토리까지 무섭다.  이제는 어서 잠이 들었으

면 좋겠다.

 

 

                                                                 ... 황순원 단편선 <독 짓는 늙은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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