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오래된 미래

연이♥ 2010. 3. 23. 11:23

 

 

 

대지와 함께 하는 삶

가지고 있는 연장이 단순한 것들뿐이어서 라다크 사람들이 일하는데 소요하는 시간은 긴 편이다.  양털에서 옷을 만드는 모직을 생산하는 일을 예로 들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일을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풀 뜯는 양들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손으로 직접 양털을 깎고 그것을 세척하고 실을 잣고 마지막으로 물레를 돌려

천을 만드는 것까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해야 한다. 음식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처음 씨를 뿌려 그것이 음식이 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정말 많은 노동이

집약되는 과정이다. 그런데도 라다크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들은 정말 느긋한 속도로 일을 하고 놀라울 정도로 많은 여가시간을 즐긴

다.

 

시간을 재는 경우에도 느슨하고 여유롭게 잰다. 1분 단위로 시간을 측정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내일 낮에 찾아올게"혹은 "저녁쯤 찾아올게"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다크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에 대해 넉넉한 여유를 남겨 놓은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의 언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많

이 있다. '공그로트'는 '어두워진 다음부터 잠잘 시간까지' 라는 뜻이고 '나이체'는 ' 해가 산 꼭대기에 걸려 있는 한낮 ' 을 말한다. 또 '새의 노래' 라는 뜻의 '치페 치

릿'은 해가 뜨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을 뜻한다.  이 모두가 넉넉하고 친숙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다.  

 

 

삶의 기쁨

어느 해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당시 예순 살의 탱화 화가 응가왕 팔조와 함께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에 갔다. 그는 그때 '곤차'라고 부르는 모직 옷을 입고 있었고,

쓰고 있는 모자며 야크 털로 만든 부츠며 모두가 전통적 차림이었다. 카슈미르 사람들의 눈에 그는 분명 라다크의 벽지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 곳에 가

든 사람들은 그를 놀려댔고 그는 계속해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택시 운전사, 상점 점원, 거리의 행인들 모두가 어떻게든 그를 놀렸다. "저 바보 같은 모자 좀 봐!" "저

웃기는 신발 좀 봐!" "저런 미개한 사람들은 씻지도 않는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응가왕은 그런 반응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여행을 즐기고 있었고 눈

에 생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놀린다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미소를 지었고 겸손한 자세

로 일관했다. 사람들이 놀리는 투로 라다크식 인사말 '줄레 줄레'를 외치면 그는 그저 '줄레 줄레' 라고 답할 뿐이었다. 내가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어도 그는 왜 화를

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응가왕의 그런 평상심은 라다크 사람들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억누를 수 없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 기쁨의 느낌이 그들 사이에 너

나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어 어떠한 환경이라도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없어 보인다. 라다크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전염성 강한 웃음에 이내 감염되고 말

이다.

 

 

 

 

서양인의 발길

관광산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무렵 나는 라다크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 변화가 전개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었다. 라다크 언어를 잘하는 상태였

기 때문에 나는 이른바 현대화가 불러온 그 강력한 정서적 압박감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라다크의 시각에서 현대사회를 바라보면서 나는 서구문화가 그 내부에서

보다는 외적으로 볼 때 더욱 성공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부세계 사람들은 사전 예고도 없이 라다크 땅으로 몰려들었다. 많은 외부인들은 매일 100달러의 돈을 썼는데, 라다크 사회가 느끼는 그 돈의 강도는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하루에 5만 달러를 쓰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라다크의 전통적 생활경제에서는 돈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간 돈이 사용되었던 것은 주로 금.은.보석

같은 귀금속류를 구입하는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은 돈 없이도 제공된다. 생활에 필요한 노동력 역시도 정교하게 짜인 인간관계의 한

부분으로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외국관광객 한 사람이 하루에 쓰는 돈은 라다크의 가정이 1년 동안 쓰는 돈과 맞먹을 정도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돈의 용도가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집에 돌아오면 생존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외국인들의 입장이 그들에게는 너무 생소했다. 먹을 것을 구할 때도 의복을 구할 때도 거처를 마련할때

도 모두 돈이 필요하고,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한 외국인들의 생활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던 라다크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라다크에 처음 왔을 때는 처음 보는 어린아이가 달려와 내 손에 살구를 꼭 쥐어주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 그 어린아이들은 낡은

서양식 옷을 입고 디킨스 소설에나 나오는 거리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칙칙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외국인들과 마주치면 빈손을 내밀려 '한 푼만 주세요, 한 푼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입버릇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움직이는 돈의 힘

전통적 경제체제에서는 시간이 풍부했고 계절이 바뀌는 경우에만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해야 할 일들은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생활은 사람들 고유의 페이스에 알맞

게 조급하지 않은 속도로 전개되었으며 모든 사람은 무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참을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경제체제는 시간을 상품화한다. 시간마저도 팔

거나 살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은 수량화 되었고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시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졌고 사람들은

생활의 속도를 더욱 빨라지게 만드는 시간절약 기술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요즘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예전처럼 이웃과 함께 보내거나 자신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연현상의 미묘한 변화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예

민하게 감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날씨가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나 별의 움직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상황에 대해 마르카 계곡 출신의 한 친구는 이

렇게 이야기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 여동생이 레에 살거든요. 여동생은 일을 빨리 하게 만드는 것들은 뭐든지 가지고 있어요. 옷을 가게에서 구하고 지프를 타

고 다니고 전화기나 가스 요리기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시간이 많이 절약될 텐데 제가 찾아갈 때면 저하고 이야기 나눌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답니

다."

 

변해가는 라다크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놀랄 만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현대세계의 생활도구와 기계들이 그 자체로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지만 그것들을 사

용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새로운 생활은 전체적으로 시간을 빼앗아가버리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개발의 결과로 도시 지역에 사는 라다크 사람들은 활용가능한

기술의 속도에 의해 경쟁을 해야 하는 새로운 경제체제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내게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전화기를 사용하는 사회

를 가정한다면 그 안에서 전화기가 없이 생활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메시지를 전해야 할 때마다 직접 상대방에게

찾아가서 전할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자동차나 버스가 운행되는 사회에서는 걸어다니거나 짐승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잠에서 깨어나

'오늘은 운전을 해서 갈까? 아니면 그냥 걸어갈까?' 라는 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이 진행되는 속도는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라다크 프로젝트

무수한 대화와 심지어 라디오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서양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 맞서 라다크를 방어해야 한다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반개발의 개념이 내 마음속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연극은 라다크 사람들이 즐겨온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였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을 통해 사람

들 사이로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당시 나와 함께 사전을 만들고 있던 겔롱 팔단과 한 팀이 되어 희곡들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작

품은 <라다크여, 뛰기 전에 잘 살펴보라>라는 것이었는데 이 작품은 당시 우리가 하던 일의 취지를 잘 요약하고 있었다.

 

리그진은 라다크의 전통문화를 거부하고 현대화된 서구 생활 방식을 따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젊은이다. 그는 라다크 음식을 먹지 않고 버터차를 마시지 않는

다. 부모들을 구식이라 비웃고 담배를 피우며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텍에서 시끄러운 서양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

면서 돈과 시간을 소비한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병을 얻자 그는 부모에게 서구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라다크인 의사를 데려오자고 설득했다. 서구의 생활이 궁금했던 그는 의사에게 소나기 

같은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런데 의사의 대답은 그를 의문에 빠뜨렸다.

 

"미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이 먹는 것은 돌로 빻아 만든 통밀 빵이에요. 우리 전통 빵하고 비슷한 것인데 그게 흰 빵보다 훨씬 더 비싸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천

연재료로 집을 짓고 있어요. 우리처럼 말이에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이 콘크리트로 만든 집에서 살지요. 또 '100퍼센트 천연섬유'나 '순모'라는 표시가 있는 옷을 입

는게 유행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은 폴리에스테르 섬유로 만든 옷을 입어요. 예상했던 것하고는 너무 달랐어요. 미국에서 현대적이라 생각되는 것 중에 정말 많은 것

들이 우리 라다크의 전통적인 것과 비슷했어요. 실제로 미국 사람들이 저한테 라다크 사람으로 태어난 게 행운이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그들의 언어를 통해 나는 라다크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사회 속으로 완전하게 흡수되어 버렸다. 서구의 생활양식이 라다크를 변형시키는 것을 지

켜보며 나는 그간 내가 속했던 문화의 모습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었다.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인 우리의 생활방식이 안고 있는 낭비와 부도덕성의 모습이 나 자신

에게 명확하게 들어왔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개발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부제: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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