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들

오월, 노고단

연이♥ 2009. 5. 10. 13:57

 

우리집 고3 수험생 우연군은 일요일도 학교엘 가야 한다.

어디 일요일 뿐이겠는가?  국경일도 없고 반공일도 없다.

한창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을 나이에 밤늦게까지 학교에 매여 있으려니 누적되는 스트레스는 기본이고,

전에 없던 온갖 병치레를 온몸으로 감내해야하는 이른바 고3병을 톡톡이 앓고 있다. 

중간고사 시험기간내내 공부는 설렁설렁 하고서 게임에만 몰두하던 우연군이

시험 끝나고 모처럼 학교에서 하루 쉬어준다며 지리산엘 가고 싶다고 한다.

 

"왜, 지리산에 가고 싶어?"

"그냥, 산에서 맡는 숲냄새가 기분을 좋게하고 높은 곳에 오르면 가슴도 뻥 뚫리고 바람도 깨끗하고..."

"꼭 지리산이어야 돼?"

"지리산의 냄새를 맡고 싶어요"

'그래, 그럼 가야지...그립고 보고픈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내가 처음 지리산을 찾았던 때가 여고 2학년때였다.

나홀로 무작정 전라선 열차를 타고 구례구 역에서 내려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산행을 했었다.

엄마의 DNA에 지리산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닐텐데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해마다 한 두번씩 지리산 타령을 하는 우연이와 함께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남행열차를 타고 지리산으로 떠난다.

 

 

화엄사 각황전(국보제67호) 

 

사찰이나 관광지에 가게 되면 기념품 하나쯤은 꼭 챙기는 우연군과 함께 화엄사 마당 한 켠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구경을 하는데

스님들께서 각황전에 예불을 드리기 위해 줄지어 가시는 바람에 살까말까 망서리던 핸드폰 줄을 다시 내려놓고서 스님들 뒤를 따랐다.

지난 초파일에는 감기에 발목이 잡혀 지내느라 연등 하나 달지 못한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잘됐다 싶어 각황전에 들러 백일기도를 접수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제35호) 

 

  

 

  

오랜 세월의 풍상에 돌로된 몸이 닳고닳아지도록 삼층탑을 떠 받들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가 마치 생물처럼 느껴져 안쓰럽기까지 하다.

'얼마나 무거울까...'

 

 

 

 

화엄사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돌아오는 기차표를 예매해둔터라 시간 배분을 잘 해야하는데 화엄사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리산 일주도로가 생기면서부터 이제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화엄사-노고단 코스엔 등산객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내겐 자주 선택되어지는 산행코스이기도 하다.

 

화엄사-노고단에 이르는 길엔 계곡의 물소리가 끊이질 않고 청아한 새소리 또한 맑고 고운 선율로 울려퍼진다.

산에만 들면 어린아이마냥 즐거워지는 우연군은 길다란 대나무 막대를 하나 주워들더니 영락없는 아이가 되어 전쟁놀이를 하며 잘도 논다.

 

올봄, 유난히 잦은 감기치레를 해서인지 산행 시작부터 몸이 무겁다.

산에선 언제나 씩씩한 모습만 보이던 엄마가 예전과는 달라 보였던지 우연군이 왜그리 힘들어 하냐고 묻는다.

그렇게 말하는 우연군 역시 공부에 치여 지내느라 체력이 엉망이다.

그리하여 우연모자, 이번 산행은 너무도 힘이 든다. 

 

 

 

몸이 힘이드니 자주 쉰다.

그래도 잠시 쉬면서 고개를 들면 하늘에 가득한 초록별이 금세 힘을 준다.

 

 

 

고지가 멀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계곡의 물소리가 경쾌하다.

물병에 남아있는 생수를 모두 쏟아버리고 계곡 물을 담았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물처럼 정말 시원하다.

다시 또 힘이 생긴다.

 

 

 

 

꽃사진을 핑계로 잠시 쉼을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네 시간만에 노고단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선택받은 자만이 오를 수 있었던 노고단엘 지금은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는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

 

노고단에 부는 바람을 맞으며 우연군이 한 마디 한다.

"7km가 이렇게 먼 거리인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월의 노고단에는 노랑제비꽃과 진달래가 만발해 거친 바람속에서도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멀리 천왕봉이 보이고,

반야봉이 지척에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S라인 물길이 트이지 못한 시계 때문에 흐릿하다.

그래도 노고단에 부는 바람은 힘들었던 산행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릴만큼 너무도 시원하다.

 

 

 

 

노고단에 올랐으니 기념사진 한 장 찍어야지? 

아들, 사진을 보니 그동안 공부하느라 많이 야위었네...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  그래도 노고단의 기 흠씬 들이켰으니 이제 수능때까진 거뜬할거야!

 

 

 

하산길에 잠시 바위에 누워 올려다본 지리산의 하늘,

아, 이대로 그냥 잠들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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