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미륵사지 가는길에

연이♥ 2008. 12. 1. 16:04

 

전날의 무리한(ㅎ) 도보로 인해 무등산에 가려던 계획은 없었던 걸로 하기로 했다.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경 내지는 취소가 가능하다는 것이 나홀로 산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주말이나 휴일이 따로 없는 남편 출근시켜야 하기에 여느때와 다름없이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새벽별이 총총한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운데 전날에 그토록 요동을 치던 바람마저도 잠잠해졌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깜깜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라도 있었더라면,

창을 여는 순간 정신 번쩍 드는 북풍이라도 냉큼 집안으로 들이쳤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무등산을 만나러 가기 위해 분주한 새벽을 보냈을 것이다.

 

그랬다.

너무 맑은 하늘,

바람한점 없는 고요한 날씨가 길 떠나고픈 마음을 되레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떠나지 않아도 되는 나홀로 산행은 그리하여 내겐 안성맞춤인 것이다.

 

집안 가득 들어찬 햇살을 그냥 두기 아까워 얼마전 친지 결혼식때 예단으로 받은 새 이불을 빨아 널고,

늦잠 자는 아이들 깨워 아침을 먹고서 장금이와 뒹굴뒹굴 하다보니 어느새 한 나절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후가 되어서도 따사로운 햇살은 여전히 발코니와 거실 한켠을 떠나지 않고,

장금이 녀석이 낮잠을 자지 않을때는 책도 못읽는데다 두 대의 컴퓨터는 연이형제가

인강을 듣겠노라고 모두 차지하는 바람에 마땅히 할일이 없는 난 또 다시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미륵사지에 가본지가 꽤 오래 되었다.

미륵사지탑 복원이 10년 기한을 넘기고도 도무지 진전이 없다보니 미륵사지를 찾는 발걸음마저 점차 뜸해졌다.

물론, 미륵사지 너른 뜰을 조용히 걷는 것 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기꺼이 즐거워라 하겠지만 그래도 미륵사지에 가면

수 년째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한 탑 복원현장을 아니볼수도 없고 보고나면 마음이 조급해지게 되니  자연 그리된 것이다.

 

그래,

오랜만에 미륵산에 올라 사방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맞고 하산길에는 미륵사지에도 들러보자...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차창밖으로 밭에 심은 무를 추수하는 광경이 보인다.

빠르게 지나쳐버린 풍경이 너무도 좋아서 무작정 다음 정류장인 연동마을에서 내려 밭으로 가 보았다.

무는 김장용이 아닌 단무지용이었는데 내 눈을 사로잡았던 하얗게 줄지어 거꾸로 박혀있는 무들은 시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반쯤만 뽑아서 잎사귀를 베어낸 상태였다.

 

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보았던 풍경은 가까이에서 보아도 그대로 그림같은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붉은 황토와,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하얀 무들의 늘씬한 자태와, 바쁜 손놀림 속에서도 재미난 얘기로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밭에서는 그야말로 초록의 무잎들처럼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사진 한 장 찍겠다고 하니 수줍어 하시면서도 '김치' 하고 외쳐주시는 센스까지 잊지 않으신다.

 

무밭을 나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보지만 한 시간에 한 대꼴인 버스를 또 언제 기다린단 말인가.

아, 프로도 아닌 주제에 사진 몇 장 찍겠다고 가던길 제쳐두고 무작정 버스에서 내린다는 말인가.

뭐, 그렇다고 후회를 하는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좋다!

오늘도 걸어가는거야!

 

 

 

 

 

서동생가지를 지나면서 겨울철새들과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무작정 지름길이려니 생각하고 남의 밭을 가로질러 언덕을 넘기도 하고,

전날 아침에 내린 비로 푹신해진 논바닥을 걷기도 하다보니 어느새 금마저수지에 다다랐다.

금마저수지는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어 나는 한반도 저수지라 부른다. 

 

 

 

한반도 저수지 아랫부분이다.

한반도의 남해안쯤 되는 지점이다보니 곳곳에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좀 더 내려가면 다도해가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반도 저수지(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해 겨울에 찍은걸로)

 

 

 

 

 

 

저수지를 지나 구불구불 고개를 하나 넘고,  아직 사과가 달려 있는 과수원을 지나고, 부대앞을 지나고 나니

잠시 가려졌던 미륵산이 다시 쨘 하고 나타났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사자암 가는길이 나오지만 이미

걸어온 시간이 미륵산 등산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어서 등산은 생략하고 곧바로 미륵사지로 가기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미륵사지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는 서산을 기웃거리느라 그림자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여놓았다.

오랜만에 찾은 미륵사지여서 탑 복원 상태가 몹시도 궁금했지만 가건물을 지나쳐 그냥 푹신한 잔디밭을 걷는다.

 

11월의 마지막날에,

혼자 걷는 모습이 더 멋진 그림이 되어주는 곳, 

미륵사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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