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들

가을, 인파속으로

연이♥ 2008. 10. 26. 14:45

나홀로 소풍을 계획하고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지만 밤새 뒤척인다.

어느 한 달 거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나의 두통은 지난달 그것에 비하면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이 아름다운 시월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주었다.  나는 한사코 싫다고 손사래를 쳐보지만 이번에는

약하게 다녀갈테니 걱정말라며 하루 두 잔의 커피와 저녁에 갈증때문에 마신 맥주 두 잔의 틈에 끼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었다.

 

오랜만에 나홀로 떠나는 여행이자 산행을 두통과 씨름하며 인상 구기고 싶지 않았건만 그렇게

은근슬쩍 내 몸안에 자리잡은 얄미운 녀석과 동무 되어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 이른 아침 길을 나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행을 하다보면 조급증으로 허둥대던 마음에 조금씩 여유가 생긴다.

사고 이후 처음 기차나 직행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할때만 해도 출발시간 몇 초를 남겨두고

차에 오르기가 태반이었는데 이제는 미리미리 역이나 터미널에 도착해서 여유롭게 자판기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뭐 필요한 물품이 더 없는지 확인도 하고 대합실에 앉아 늘 켜있는 텔레비전을 보기도 한다.

 

오늘은 터미널까지 가는 택시비를 아끼려고 남편 출근길에 따라 나섰더니 전주에서 강천사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2년 전쯤에 우연이와 함께 지리산 천년송을 만나러 갈때만해도

우연이가 "마치 옛날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할 정도로 시골 터미널 특유의 풍경을 연출하던 전주

터미널은 지난 봄, 기존의 공간과 건물에 살짝 리모델링을 해서 제법 그럴 듯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두통과 동무하기로 한 터라 가볍게 읽을거리 하나 챙기지 않았기에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남은 40분 동안

딱히 할일이 없는 나, 괜시리 터미널 이 곳 저 곳을 어슬렁거리며 시간때우기를 한다.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

하긴 했지만 산행중에 혹시라도 배가 고플까봐 군것질 거리를 좀 더 살까 싶어 가게들을 기웃거리지만 막상

먹고 싶은게 없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 쓸쓸한건 바로 맛있는 먹거리가 빠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서 먹으면 그 맛을 잃게된다. 결국 터미널에서 20분 동안 가게 앞을 어슬렁 거리던 난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는 걸로 족했다.  그리고 출발 20분 전에 미리 도착한 버스에 첫 번째로 올라탄다. 

 

내장사, 백양사와 함께 애기단풍으로 유명한 강천사행 버스에는 단풍놀이 가려는 사람들이 속속 올라타면서

금세 왁자지껄 활기가 돈다.  친구끼리 소풍을 나선 중고생부터 대학생 연인 커플, 계모임에서 모처럼 시간을

아주머니들, 그리고 유일하게 등산복 차림을 한 나, 이렇게 나들이에 들뜬 여행객들을 가득 태운 버스는

나의 긴 기다림을 터미널에 남겨두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주시내를 벗어나니 쌀쌀해진 날씨만큼이나 가을빛이 더 한층 짙어져 있다.

허름한 농가를 배경으로 잎은 모두 떨어진채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를 보면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단풍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걸 보면서 괜시리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 정말이지 괜시리 울컥할만큼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강천산 드넓은 주차장은 초입부터 이미 차들로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내린 행락인파로 인해 버스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수도 없어서 주차장 초입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

강천산 매표소에서는 '강천사 문화재 관람료' 천원을 징수하고서 튜브로된 순창고추장 한 개씩을 나눠준다.

다른 사찰의 문화재관람료에 비해 저렴한데다 비록 홍보용이지만 고추장 한 개를 받아드는 사람들의 표정이 흐뭇하기까지 하다.

 

내가 이토록 붐비는 강천산을 오늘의 산행지로 택한 이유,

어차피 행락객이 붐비는 곳은 산 아래일뿐 막상 산으로 올라가면 절대 붐비지 않는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선 내장산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주면 내장산에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인파가 몰릴테지만 나는 다음주에도

내장산 산행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내장산은 이곳 강천산과는 달라 주차장에 접근하기 전부터 차가 엄청시리 밀린다는

계산을 포함해야 한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  아기자기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강천산을 찾은 그 수 많은 인파속으로 들어갔다.

 

 

 

 

 

 

 

강천산 계곡의 물빛이 너무나 맑다.

맑은 물은 자꾸만 내 마음을 사로잡고 눈길을 머물게 한다.

물에 손을 담가보지 않아서 얼마나 차가운지는 모르겠지만 송어들의 힘찬 자맥질에서 덩달아 몸에 생기가 도는 듯 하다.

 

 

 

 

 

 

 

 

 

  

 

 

 

 

매표소에서 구장군폭포까지 걷는 동안 이른 아침에 먹은 누룽지 한 그릇의 힘을 다 소진했는지

폭포에 도착할 무렵엔 예고도 없이 허기가 진다.  남들이 배고프다고 하는걸 나는 뇌가 고프다고 표현한다. 

나의 뇌는 유독 허기를 못견디다보니 조금만 배가 고파도 어서 탄수화물을 공급해 달라면서 막무가내로 어지럽고

손발이 떨려온다.  

 

비록 원래의 폭포에 인공으로 물을 내리기는 하지만 시원한 폭포수 소리를 들으면서 보온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는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반찬이라야 김치와 계란말이 딸랑 두 가지인데 눈 깜짝할새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수 많은 인파속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가을 가뭄이 심해서 저수지마다 물이 말랐다.

이곳 강천호도 이렇듯 물이 마른건 처음본다.

단풍이 곱게 물든 반영을 담아보고 싶었던 희망도 물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적당히 너 저머를 보여주고 초록이던 나뭇잎들이 각양각색 자신만의 빛깔을 뽐내는 가을산의 여백을 참 좋아한다.

그리고 발에 밟힐때마다 사그락거리는 떡갈나무 낙엽의 경쾌한 소리가 참 좋은 가을날이다.

  

 

 

 

 

산행을 마치고 다시 인파속으로 들어간다.

아직은 청단이 많은 강천산의 단풍은 비록 오랜 가뭄으로 제 빛을 내지 못했지만

단풍보다 더 곱게 단장하고 산을 찾은 수 많은 사람들의 오늘 하루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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