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들

어린이날에

연이♥ 2008. 5. 5. 21:01

  

 

 

삼일간의 연휴 마지막날인 오늘은 어린이날, 

친정에 가서 어린아이처럼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뒹굴거리려 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여는 순간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어젯밤 살짝 내린 비는 밤새 산도 들도 심지어는 햇살마저도 그 빛을 바꾸어 놓았다.

이토록 찬란한 오월의 신록과 햇살속으로 빠져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 아름다운 계절을 노래하리오!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년의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살이었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得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갑작스런 산행이어서 일단은 백양사역까지 가는 표를 끊고 기차를 탄후에야 구체적인 산행 계획을 세워본다.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백암산에서 내장산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터라 왕복이 아닌 건너가는 산행이라면

대여섯 시간이면 충분할거란 계산하에 자세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탐방지원센터에 들렀다.

 

- 백암산에서 내장산까지 가는 길 안내좀 부탁합니다

- 지금은 산불예방 기간이어서 내장산 입산금지입니다

- 제가 알기론 국립공원 입산금지는 4월 30일까지로 알고 있는데요

- 아닙니다 아직 입산금지입니다 

  그리고 내장산 넘어가려면 혼자서는 위험해서 안됩니다

  길을 잃을 우려도 있고 그곳은 멧돼지가 많이 출몰합니다

- 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 아홉 시간 걸립니다

 

낭패다.

대여섯 시간이면 충분할줄 알았는데 아홉 시간이라니!

제아무리 줄인다해도 초행길이어서 일곱 시간 이하로는 힘들테고 무엇보다 입산금지래잖니~

그냥 백암산 정상에나 역삼각형 그리며 다녀와야겠다.

 

 

 

 

백암산 백양사,

워낙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언제나 가을에만 찾았었는데 연초록 단풍나무 숲길도 가을의 단풍 못지않게 눈이 부시다.

  

 

 

  

  

 

 

 

백양사 경내를 빠져나와 등산로로 접어드는 길 양옆에는 비자나무가 받들어총 자세로 늘어서있다.

백암산 비자나무에는 저마다 꼬리표를 하나씩 달고 있었는데 아마도 특별(?) 관리를 위해 번호를 매긴 듯 하다.

내가 확인한 숫자로 보건대 백암산에는 삼천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있고 이들 모두는 귀하신 몸 대우를 받고 있지않나 싶다.

겨울 눈속에서도 위풍당당함을 뽐내는 비자나무는 정말 멋진데 신록의 계절에 보는 비자나무는 어째 때낀 옷을 빨지 않고 입은것처럼

칙칙해 보이기까지 한다.

 

약사암에서 땀을 식힌후 백학봉을 향해 오르는데 절벽에 붓꽃 한 무리가 피어있다.

오르지 못하는 절벽에 피어있으니 더 고고하고 예뻐보인다.

 

 

  

 

산에 오르니 고불총림 백양사 가람이 한눈에 잡힐뿐만 아니라 아래서는 미처 모르고 지나친 부도밭도 보이고

부도밭 옆에는 커다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연보랏빛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검정,파랑,초록,하양...

타일조각 같은 남도들판이 그대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백양사 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길에 지나쳤던 아름다운 장성호도 보인다.

나는 어쩌면 이 시원스런 눈맛을 즐기려고 산에 오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잠시 웃는다.

오르는내내 이어진 나무계단과 철계단 그리고 한동안 갈지자로 계속된 가파른 등산로는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어

이곳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 그늘아래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이 어린이를 졸업한 이후로는 해마다 어린이날에 산행을 하는데 어린이날에는 어느 산엘가도 한적해서 좋다.

오늘도 이곳에 오르기까지 단 한 명의 등산객을 만나지 못했다.

그야말로 산에는 청아한 새소리와 송화가루 실어오는 바람소리 그리고 내 가쁜 숨소리만 들릴뿐이었다.

 

 

 

 

산정에는 아직 곱디고운 연달래가 활짝 피어 거센 바람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아무래도 올봄 연달래와의 마지막 눈맞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산벚꽃 피는 사월에 오르면 정말 아름답다는 백암산엔 어느새 신록이 산의 여백을 채워놓았다.

겨울산의 당당한 속내도 아름답지만 신록으로 가리운 초여름의 싱그러움도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게 또한 산이 지닌 매력이다.

  

 

 

 

 

 

오늘 어린이날에...

친정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 한그릇 먹고 싶었는데 이렇게 또 바람처럼 훌쩍 떠나 떠돌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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