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들

화엄사~노고단

연이♥ 2007. 11. 11. 21:55

 

05:30...

책을 읽을까?

티비를 켤까?

다시 잠을 더 잘까?

..........................

남행열차를 타고싶다...

 

새벽 출근을 하는 남편의 아침식사로 끓여준 누룽지 남은걸 먹고난 뒤 갑작스레 분주해진다

압력솥에 밥을 안치고 어제 통통한 생물 고등어 한 마리 사다가 소금 뿌려 둔걸 기억해 고등어 찜을 하고 

국 대신에 아이들이 잘 먹을만한 계란찜을 하고 내 도시락도 간단히 준비한다

 

07:25...

익산발 여수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넓은 차창밖으로 아침햇살이 찬란하게 비친다

나홀로 기차를 타고 떠남은 언제나 설레게 마련이다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 찬란한 아침햇살은 축복이다

 

 

 

아침햇살이 정말 맑고 깨끗하고 예쁘다

 

 

 

1년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 화엄사...

그 당시에 각황전에는 무슨 불사를 하느라고 연등이 잔뜩 걸려있었던것 같고

절집 곳곳이 보수 등을 하느라 여간 어수선한게 아니었는데 여전히 한켠에서는 보수를 하느라

중장비들도 보이지만 그나마 각황전은 웅장한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

 

 

 

 

 

열아홉 나이에 불사에 참여한 그 목수가 각황전을 다 짓고 났을 때는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한다

실로 육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고 그는 그 동안 각황전 언저리를 한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완공과 함께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푼 그는 각황전 돌계단을 걸어내려와 뒷개울로 사라졌다

그는 한나절이 넘도록 몸을 씻었다

그리고 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 어둠에 묻혀 있던 경내가 갑자기 휘황한 빛으로 밝아졌다

놀란 대중들이 밖으로 나와보니 한 마리의 백학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각황전 위를 너훌너훌 날고 있었다

그 백학은 각황전 위를 세 번 돌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목수를 어찌 기술자라고만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각황전이 어찌 솜씨로만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솜씨 뛰어난 기술자였을 뿐이라면 그 목수가 어찌 육십 년의 세월을 견디고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

매시가 차가운 인내로 채워졌음이고 하루하루가 뜨거운 신심으로 타올라 마침내 시공계를 초월하는 경지에

들어 육십년 세월이 하루같이 된 것이 아닐 것인가

 

인간의 시간으로 그 긴 육십년을 하루로 초월한 청정한 영혼이 빚어낸 솜씨는 또 어떠했으랴

이미 범상을 벗어난 그 솜씨로 빚어낸 것이기에 각황전은 저리도 빼어나고 신비로운 불전이 된 것인가...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 중에서...

 

 

 

 

 

 

화엄사를 지나 산에 오른다

예전 같으면 지리산 종주산행의 출발지였을 화엄사-노고단 가는 길은 지리산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부터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하다

 

하지만 나홀로 산행에 지루함이란 없다

얼굴을 간지르는 바람도 즐겁고 살짝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햇살도 즐겁고

무엇보다 찾는이가 드문 산길을 홀로이 마음을 가벼이 하고서 눈에 띄는 모든 것들에 인사를 건네며 걷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좋다

 

 

  

 

 

참샘에서 목좀 축이고...

아침에 누룽지를 먹어서 그런지 11시밖에 안되었는데 배가 고프다

갓지은 밥을 보온도시락에 담아갔더니 뜨끈뜨끈한게 밥을 보는 순간 입에 침이 고인다

홀로 먹는 밥이지만 꿀맛같은 이른 점심이다

 

 

 

 

 

가을산에 여백이 제법 생겼다

산정은 이미 겨울산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을이라 말하자...

 

 

 

구비구비...

언제봐도 가슴 탁 트이는 화엄사계곡 그리고 섬진강...

산행을 시작할때와는 달리 날씨가 많이 흐려졌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럴 것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엔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자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난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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