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요절한 나라의 미술

연이♥ 2015. 12. 9. 15:30

 

 

 

왕궁리오층석탑

 

 

 

미륵사지석탑(1997)

 

● 미륵사탑과 왕궁리석탑의 건립은 선후관계가 아니라 동시적일 가능성이 있다. 대규모의 사찰에서는 미륵사탑 같은 결구가 불가피하지만

소규모의 사찰에서는 왕궁리탑 같은 간략화된 추상적 구성이 불가피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 두 탑의 차이는 규모에서 비롯된 것이지 목조탑의

충실한 모방의 과정에서 판단되는 선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추상과 사실의 개념은 선후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언제나 사실에서 추상이 도출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그 두 가지는

사물의 다른 인식작용의 결과라 하겠다. 미륵사탑의 사실성에서 왕궁리탑의 추상성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도 틀에 박힌 사고

방식이다. 고대인들은 처음부터 기하학적·추상적 표현능력과 사실적 표현능력을 동시에 구비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동시성이 가능하다면 미륵사석탑은 사찰의 초창기에 사찰의 중심부인 일목탑(一木塔), 일금당(一金堂)의 중앙랑(中央廊)이

성립된 후 계속하여 좌우외랑이 증축되어 갔을지도 모른다. 현재 노출된 대가람의 규모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을 것이며, 단번에

되었다면 중앙에는 목탑, 좌우에 석탑이 계획된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에서의 석탑의 발생은 재고를 요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호류지 오중탑

 

기단부와 탑신부의 비례관계를 고려한다면 그 전체 구도와 구성은 미륵사탑보다는 오히려 왕궁리탑이 목조탑에 더 가깝다. 나는 늘

일본 호류지 목조 오층탑(8세기) 앞에서 정림사탑과의 양식적인 친연성을 강하게 느끼곤 하였다. 호류지탑도 정림사탑이나 왕궁리탑처럼

기단이 낮고 좁으며 옥개에 비하여 옥신이 급격히 좁아 날렵하고 위급한 느낌을 준다. 미륵사탑은 목조건축을 충실히 모방하였다고 하나

부분적으로는 몰라도 전체구도는 오히려 거리가 멀다. 석조로 거대한 탑을 구축하기 위하여는 목조에서의 구도와 구성을 오히려 크게 변형

시켜서 옥신부를 상당히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립사탑에서 왕궁리탑으로의 형식적인 이행은 가능하나 이 두 소규모

의 탑과 미륵사탑과의 관계는 불분명해진다.

 

 

 

 

 

감은사탑

 

 

고선사탑

 

● 왕궁리석탑에서 감은사탑(感恩寺塔)으로 곧바로 이행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단부와 탑신부의 비례관계를 보면 왕궁리탑과

감은사탑이 가장 가까울 것이고 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통일신라 석탑에서 기단부보다 탑신부가 월등이 큰 것은

감은사탑이 가장 심하고 그 다음으로 고선사탑(高仙寺塔)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옥개석 부분만이 백제의 왕궁리탑의 것이 신라지역에서

신라양식으로 변한 것이다. 즉 왕궁리탑은 그 나름의 백제 양식의 완성이어서 신라 석탑의 시원을 이루는 것이지 하나의 과도현상으로 볼수는

없다. 그 과도기적인 것이란 개념은 통일신라 초기의 것을 전형으로 삼았을 때의 상대적인 성격의 것이다. 오히려 통일신라 중엽기의 것,

가령 불국사석가탑을 전형으로 삼았을 때 통일 초기의 것이 과도기양식에 속한다고 하겠다.

 대충 이렇게 느꼈던 것들을 정리하고 달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니 충청도지방의 붉은 흙은 석양빛에 엇비추어 붉다못해 타오르는 듯하였다.

 

 

 

 

 

 

의성 탑리오층석탑

 

 돌아와서 책을 몇 권 뒤져보니 왕궁리탑의 연대에 대하여 백제설,통일신라 초기설, 고려시대설,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백제설의 경우 백제 것과 신라 것 사이에 과도기적인 것으로 의성 탑리석탑(義成塔里石塔)을 둔 것도 알았다. 여러 사람의

의견 가운데 나는 다시금 고유섭(高裕燮)의 혜안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나에겐 의성 탑리석탑이야말로 전탑과 목탑 두 형식의 혼합이요, 감은사탑이 의성 것보다는 왕궁리 것과 더 친연성이 있다는

느낌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저러나 백제탑의 완성이며, 신라탑의 시원을 이루는 것을 통일 초, 혹은 고려탑이라 한다면 미술사 연구에

있어 이 무슨 엄청난 손실인가.

 

 백제예술은 참으로 경쾌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때로는 극적이어서 모짜르트의 음악 같다.

백제미술은 요절한 나라의 미술이다.

 

                                                                     강우방 저 <美의 巡禮>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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