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구국의 출사표

연이♥ 2013. 3. 14. 20:54

 

 

무등산 입석대(주상절리대)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의 국방이 튼튼치 못한 틈을 타서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장수들은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고 수령들은 도주하여 산골로 숨어 버렸다.

적들의 포위 속에 부모를 버려둠이 이 어찌 차마 할 노릇이며, 임금에게 나라를 근심케 함이 그대들에게 편안하겠는가.

백 년 동안 교화된 백성들로서 어찌 한 명의 의기 있는 사나이도 없단 말인가?
의롭지 못한 군대를 끌고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옴은 본래 병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나라 백성들로서 왜적의 침입에 아무런 대책이 없이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구나.
장강長江이 갑자기 천혜의 요새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서울까지 기어들었다.

나라에 인재가 없다는 조롱도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원수들이 제 마음대로 덤벼드는 모양도 못 볼 일이다.

아, 우리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하였으나

이 또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지방 순시를 나간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불길한 전방의 소식으로 인하여 임금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어렸고, 임금의 행차는 높은 산, 험한 고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하늘이 이 나라를 구할 원로를 보내오고, 우리들을 믿는 임금의 간곡한 교서가 오늘도 내려오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사람으로서 통분한 나머지 목숨을 바치려는 생각이 없겠느냐?

어쩌다가 일이 잘못되어 나라가 이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가?

피난 간 임금의 수레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는데 용인으로 올라오던 우리 군사들은 패전하고 말았다.

저 땅벌과 같이 추한 왜적들을 들끓고 있는 데, 아직 그들을 죽이지 못한 탓으로 원수들이 서울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드는 것이 장막의 제비와 같고, 서울 근처에서 둥지를 틀고 있으니 울안에서 뛰노는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명나라 군대가 소탕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들을 한 놈도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고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류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자기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

이는 모두가 강요해서 왔거나 억지로 모여든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국가 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을 아끼려고 하겠느냐!
의리를 위하여 떨쳐나선 군대이니 신분의 귀천과 직위의 고하에 상관될 바 없으며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지 견고한지를 논할 바가 아니다.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 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 다 함께 분발하였다.

아, 각 고을 수령들과 각 지방의 인사들이여! 어찌 나라를 잊어버리랴? 마땅히 목숨을 저버릴 것이다.

혹은 무기를 제공하고 혹은 군량으로 도와주며 혹은 말을 달려 선봉에 나서고 혹은 쟁기를 버리고 논밭에서 떨쳐 일어서라!

힘닿는 대로 모두 다 정의를 위하여 나선다면 우리나라를 위험 속에서 구해 낼 것인바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임금이 피난 간 곳은 저 먼 북쪽 땅이나 국가는 곧 회복될 것이니 어찌 북쪽 땅에서 오래 머무를 것이냐.

초기에는 비록 불리했으나 나라의 형편은 바야흐로 좋아지고 있고, 이 나라를 수호하려는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호탕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제때에 시국을 바로잡아야 하나니 부질없이 앉아서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 백성들은 이 나라의 회복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마땅히 의기와 힘을 내서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의 진심을 토로하여 널리 고한다.             

 

임진왜란 당시 문관출신 의병장 고경명의 마상격문(馬上檄文) 전문을 옮겨본다.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과 견줄만큼 명문으로 알려져있다.

문장에서 힘과 패기가 넘쳐나 백성들로 하여금 분연히 일어나 구국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호소력 짙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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