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답사> 가을비 내리던날에...

연이♥ 2012. 10. 28. 14:42

 

★ 수원화성

 

 정조대왕은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 지금의 화성군 태안읍인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의 중심부에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

되었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이 축조 되었다.

 

 화성성역의 배경은 당쟁에 휘말려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을 조선최대의 길지로 옮기고자 하는 염원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또한 사회.경제적으로는 청나라에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됨에 따라 과학문명과 서학 등의 사조가

조선에도 유입되었고 북학파,실학파가 등장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수원의 중심부에 있는 143m의 팔달산 동쪽에 자리잡았다.

동쪽과 서쪽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북쪽과 남쪽은 평지에 성을 쌓아 올렸다.

 

 축성은 김종서,유성룡,유형원 등의 성제를 연구한 바탕 위에 중국 성제의 장점을 채택하였다. 중국성제의 장점은 벽돌의 사용과

공심돈과 같은 시설물을 들 수 있다. 또한 거중기,녹로,유형거,각종 수레 등 새로운 과학기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축성에 참여한

인부들에게는 일한 만큼 돈을 지불하는 성과급제를 시행하였고 문루,도로,수문,교량,연못,식목사업 등 도시 기반시설을 마련하고

만석거를 건설하고 둔전(屯田)을 경영함으로써 산업기반시설도 완비하였다. 이후 만석거의 성공에 힘입어 1799년 축만제(서호)를

축조함으로써 우리나라 과학영농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또한 종로를 중심으로 상업 자본을 유치하여 수원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총공사기간은 10년 계획에서 34개월(1794.1~1796.9.10)로 단축되었는데 거중기 등의 과학기기를 이용한 점과 성과급제로 인한

동기부여가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화성 성역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화성도, 각 건물 설계도, 과학기재와

부속건물의 그림, 목수, 미쟁이, 석수, 화공 등의 이름과 명단, 자재의 양, 비용 등 모든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된 화성을 1975~1979년 사이에 복원을 하였다.

 

 화성의 규모는 둘레 약 5.7km, 성벽 높이 5m 정도, 여장의 높이는 1.2m이다. 여장은 4m 길이를 1타로 하고 1타에 근총안 1개,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구멍을 내었다.  화성의 중심 건물은 화성행궁(華城行宮)인데 봉수당,장락당,낙남헌 등 총 570여 칸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행궁이며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현재 복원중이다.

 

 화성 성역은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사회.경제.정치적 제 조건 속에서 정조를 정점으로 한 관료.

학자.기술자.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며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광교산.수원천과 같은 자연과 인공호수.

성곽건축물과 같은 인공이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최대의 토목공사이며 성곽 자체는 각기 다른

50여 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진 '성곽의 꽃'이다. 화성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 그리고 자족적 신도시를 지향한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실현한 곳이다.

                              ...자료출처,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컬리지 김준혁 교수 <수원화성 건설의 의의> 중에서...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가을빛이 한층 깊어가는 시월 하순,

왕궁리유적전시관 주최로 수원화성과 남한산성 답사를 떠나는데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전날 퇴근길에 올려다본 하늘엔 제법 볼록해진 달이 참 밝게도 떠 있었건만...

 

우중에도 먼저 행궁에 도착해 답사팀을 기다리신 김준혁 교수님의 안내로 행궁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한다.

                   

 

 

 

이곳 봉수당에서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8일 동안 베풀었다는 기록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남아있다.

 

 

 

때마침 화령전(華靈殿)에서는 정조 탄신 260주기 제향(祭享)을 지내고 있었다.

화령전 운한각(雲漢閣)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27명의 조선 왕중에 종묘가 아닌 별도의

사당을 지어 어진을 봉안한건 태조 어진을 봉안한 전주 경기전(慶基殿)과 수원화성 행궁에 있는 화령전 뿐이다.

 

김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곳 화령전의 영적인 기운이 엄청 세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명절에 성묘 마치고 반드시 이곳 화령전에 들러 정조대왕께 참배를 하신다고...

영적인 기운이 쎄다는 말씀에 그만 욕심이 생겨 축문을 낭독하는 동안 사모해 마지않는 정조대왕께 소원성취 기도를...

 

 

 

 

 

 

서남방향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북각루 방향 성벽바깥쪽에는 억새를 많이 심어놓았는데 이는 전쟁 시에 불화살의 재료로 쓰기 위함이라고 한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속에서도 김교수님의 열강에 진지하게 배우는 답사팀...

 

 

 

 

장안문(북문)

 

 

동북각루(방화수류정)

각루로서의 외관도 빼어나지만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수문(화홍문華弘門)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7개의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어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위 환경이 잘 어우러져

수원 8경의 하나이다. 홍예문 위로는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성가퀴를 쌓고 여러개의 총안을 뚫어 놓았다. 북수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과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의 하나이다.

 

 

 

★ 남한산성

 

 

 

 

 

수원화성 답사를 마친 후에 점심식사를 하고 남한산성에 도착했을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린다.

아니, 그칠 기미는커녕 오히려 빗줄기가 거세진데다 바람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김교수님의 열띤 강의는 계속되고...

 

 

 

 

 

 

남한산성에 물든 가을빛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웠지만 우산을 들고서 한 손으로 카메라를 작동하다보니

미처 숙지하지 못한 기능들을 건드리는 바람에 남한산성에서 찍은 대부분의 사진이 초점이 맞질 않았다.ㅠ

 

 

 

 

 

남한산성...

답사가 아닌 나들이 였더라면 가을비 내리던날의 너무도 아름다운 남한산성의 운치를 맘껏 즐겼을텐데

답사하느라, 종일토록 내리는 비에 카메라 습기찰까 전전긍긍 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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