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백제 한성 유적 답사

연이♥ 2010. 11. 7. 16:32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5주 동안 매주 토요일에 실시하고 있는 문화강좌 <고대국가의 도성과 왕궁> 가운데, 

이번주에는 '백제 한성 유적 답사'를 다녀왔다.

 

 

 

◎ 풍납토성

 

노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이다(서쪽 한강변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올림픽대로 등의 도로가 난 상태)

 

 

* 개요

 

풍납토성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1,2동에 위치한 토성으로 길쭉한 육각형 모양이다.

1925년 7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대 홍수로 인해 서쪽 성벽의 대부분이 유실되어 성의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으나,

남아있는 세 방향의 길이를 종합해 볼때 성벽의 전체 길이는 3.5km 정도로 추산된다.

 

풍납토성은 1963년 1월에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적의 정식 이름은 '광주 풍납리토성 '이다.

그런데 이때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성벽 뿐이다.(그것도 전체 3.5km중 훼손된 부분을 제외하고 약 2km의 성벽만 지정되었다)

성벽의 가치는 그 안에 형성된 도시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인데 성벽만을 사적으로 지정하다보니 성벽 안에 있는 지역의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한채 무분별한 택지개발 대상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사적으로 지정된 성벽조차도 몇 년이 지나 일부가 훼손

되면서 택지로 변하자 사적에서 제외되었다.

 

현재는 풍납토성내부에 대부분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토성안의 인구수가 4만명에 이른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아파트 건축 공사 현장에서는 수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지만(드라마 '자이언트'에서도 나온다)

건설회사에서는 이를 쉬쉬하며 밤에 몰래 유물들을 반출하여 폐기시켜 버렸다.

 

1990년대 후반에서야 이 사실을 알고 풍납토성 내부 발굴을 시작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지역에 아파트가 건설되고 난 후의 일이다.

더욱이 발굴 과정에서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의 항의가 심할뿐 아니라 발굴에 필요한 경비 또한 건설회사 측에서 부담해야 하다보니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문화재청과 발굴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의 간절한 바램과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에서

예산을 책정해 풍납토성 일대를 전면 발굴하기로 하였지만 정권교체 과정에서 약속된 재정지원은 흐지부지 되어버린 반면 개발은 계속

진행되어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찬란한 백제 문명은 한국판 폼페이가 되고 말았다. 

 

 

풍납동 현대아파트 옆 동쪽성벽

 

* 발굴

 

1999년 여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제2동문(영파여고 뒤편에서 풍납2동의 미성아파트까지 연결되는 도로)과 제3동문(제2동문에서

400미터를 내려와 극동아파트로 이어지는 도로) 사이의 성벽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최대 폭은 43m, 높이는 11m 이상이었다. 

축조방법은 발굴 지점마다 조금씩달랐으나 오늘날의 댐공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과학적이고 복잡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풍납토성은 한강변의 완전한 평지에 세워졌다.

먼저, 황갈색 모래땅 위에 뻘흙을 대략 50cm두께로 깔고, 그 위에 다시 모래성분이 많은 진흙을 20cm정도 깔았다.

이후 여러 종류의 진흙을 번갈아 두껍게 쌓아가며 사다리꼴 모양의 중심토루를 만들었는데, 가장 아랫부분의 폭은 약 11m이다.

이처럼 흙을 층층이 다져가며 쌓는 방식을 판축법(版築法)이라고 한다.

 

중심토루를 만든 다음에는 그 안쪽과 바깥쪽으로 각각 덧대거나 잇대어 진흙을 겹겹이 쌓아올림으로써 성벽의 두께를 늘였다.

성벽을 높게 쌓으려면 우선 폭을 넓혀야 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방법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결국 성벽의 폭이 43m에까지 이른 것이다.

중심토루에다 한 겹씩 덧대듯 넓혀나간 성벽의 바닥에는 군데군데 뻘흙을 1~3겹씩 두껍게 깔았다.

 

중심토루에서 안쪽으로 7~8m 떨어져 네 번째로 잇대어진 작업구간에서는 잘 다듬어진 각목들이 일정한 규격으로 짜 맞추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뻘흙을 깔 때 쓰는 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해진 나무틀 안에다 끈적끈적하고 질긴 뻘흙을 넣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은 지금의

철근 콘트리트 공법을 연상시킬 정도로 인상적인 공법이다. 특히 나무 틀 안에서는 뻘흙을 10cm정도 깔고 나뭇잎.볏집 등을 1~2cm 깐 다음

다시 뻘흙을 덮는 방법을 12차례나 반복하였다.

 

이처럼 뻘흙에 식물유기체를 교대로 섞는 방법을 일본에서는 '나뭇잎깔기'라고 하는데, 지진 등의충격에 쉽게 견딜 수 있도록 유동성을 확보

하기 위해 고대의 성벽이나 제방 축조에 널리 쓰인 방식이라고 한다.  뻘흙과 나뭇잎을 층층이 쌓으면 층 사이에 마찰력이 생겨 흙벽이 밀리는

현상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일제 때의 사진에는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 바깥에 마치 강인 듯 호수인 듯 드넓은 해자(垓字)가 나온다.

성벽보다도 넓은 듯한 해자의 일부는 나중에 매몰되고 일부는 하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하수도마저 복개되어 2차선의 넓은 도로로

버렸다. 그러니까 웅장하기 그지없는 풍납토성의 재료(흙)는 대부분 성벽 바깥에서 퍼올린 것이며, 그로 인해 성벽 바깥에는 아무리 얕다 해도

깊이가 한길은 넘을만한 하천(해자)이 형성된 것이다.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각종 생활유구와 토기 가마, 그리고 3중 환호(環濠) 등이 발굴 조사되었다.

생활유구는 평면 형태가 말각방형(抹角方形)인 수혈주거지, 육각형주거지, 그리고 기와를 사용한 주거지 등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말각방형 주거지와 3중 환호로서, 발굴단은 풍납동식 무문토기에 타날문토기의 기유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시기라고 하여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경으로 편년하였다.

 

그보다 조금 늦은 육각형 주거지가 대체로 2~3세기대에 만들어지며, 나머지 몇몇 유구는 4~5세기대에 속한다고 보았다.

즉, 기원을 전후한 무렵 말각방형 주거지에 거주하는 초기 백제 유민들이 환호를 만들었고, 늦어도 2세기 경에는 환호 대신 토성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조사팀은 토성 내부의 주거 흔적과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풍납토성이 대략 1세기경에 축조되어 5세기경까지 사용되었으며

군사적 성격이 강한 읍성이라고 추정하였다.

 

풍납토성이 곧 백제의 하남위례성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학계의 통설로 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주거지와 화려하고 수준 높은 유구유물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백제의 가장 큰 평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제가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삼국사기>등의 기록에는 백제의 도성으로서 한성(漢城)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기록에는 한성이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을 합친 이름으로 나오는바, 북성을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을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풍납토성과 그 주변 일대는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때부터 서기 475년 개로왕때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어 웅진(熊津)

으로 천도할 때까지 수백년간 백제의 도읍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 풍납동 유물 전시

 

풍납동 영어마을 안에 풍납토성 내부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BC 1세기 경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풍납동식 경질무문토기 부터 AD 5세기 후반에 이르기 까지의 다양한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풍납동에서 출토된 기와는 기존의 백제 기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화문이 아닌 독특한 문양이 새겨 있다.

 

 

                              

 

            

 

 

           

 

 

         

 

                                                     

 

                                                 

 

                   

 

 

 

올림픽대로 옆 발굴 현장

 

 

◎ 풍납토성 경당지구

 

이곳에서 발견된 시설과 유물은 모두 백제가 한성을 도읍으로 삼았던 무렵에 왕.귀족 등 최상류층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될만큼 고급품이다.

흙을 다져 쌓은뒤 건물을 올렸을 것으로 보이는 초대형 지상건물, 제사에 사용된 듯한 말머리뼈와 깨진 토기 등이 잔뜩 발견된 구덩이,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가 다수 출토된 창고, 나무와 돌로 깊고 정연하게 쌓은 우물 등 경당지구의 다양한 시설과 유물은 백제 초기 지배층의 삶과 문화를

알려준다. 

 

 

경당지구 우물터에서 이번 '백제 한성 유적 답사'의 안내를 맡아주신 김기섭 백제한성박물관 건립추진단 전시기획팀장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답사팀 

 

  

풍납토성이 있는 송파구는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중 한 곳에 해당되다보니 문화재 발굴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게 주민과의 마찰이다.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유재산이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개개인의 이익을 도외시 할수는 없는 일이다.

풍납토성 경당지구는 이러한 주민의 재산권과 정부의 문화재 보호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예로 문화재 보호구역 내에 벤치 등의 

쉼터와 운동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경당지구 내에 있는 우물은 매우 독특한 형태로 우물 아래쪽은 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위로 올라가면서 차츰 모를 죽여 맨 위쪽은 둥글게 처리하였다.

발굴당시 우물 바닥에는 200점이 넘는 토기가 5겹으로 층층이 채워져 있었고 그 위는 돌과 흙으로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의 토기에서 입부분을 일부러

깬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토기를 매납할 당시 제사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물을 감싼 방형의 기초부 주변에는 긴 도랑이 확인되면 그 내부

에서는 목통의 흔적이 있어서 단순히 물을 긷던 우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물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로 볼때 4세기 말이나 5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다.

 

 

초대형 건물터

 

 

 

◎ 석촌동 고분

 

한강유역의 가락동과 석촌동 일대에는 수많은 백제 무덤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고분군은 대체로 한강에서 1km 이내의 평지 혹은 낮은 구릉에 입지하고 있다.

주위에는 넓은 늪지가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쪽의 탄천과 북쪽의 송파천이 한강 본류에 합류하면서 생긴

일종의 삼각형 지형 안에 고분군이 위치하여 하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석촌동 일대는 돌무지무덤,움무덤,돌방무덤 등 백제초기 한성시대의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석촌동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방전까지만 해도 돌무지무덤을 비롯하여 89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해방후 잠실 일대에 대한 개발이 진행되면서 3.4.5호 돌무덤만이 남게 되었다.

 

초기 백제시대의 무덤은 움무덤계와 돌무지무덤계로 크게 나뉘어 지는데, 이중 움무덤은 토착민계통의 무덤이며,

돌무지무덤은 고구려계 유이민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백제의 왕과 그 일족의 무덤으로 보이며,

4세기 말에서 5세기초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이 있는 공원의 가을이 깊을대로 깊었다.

가락동 고분군도 답사 일정에 포함 되어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석촌동 고분군에만 들렀다. 

 

 

 

  몽촌토성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은 낮은 자연구릉의 끝 부분에 토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가락동과 방이동 일대에 발달한 구릉지와는 약간 떨어져 있어 독립구릉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지세로서 높낮이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따라서 구릉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토성의 평면 형태는 불규칙할 수밖에 없다. 크게 보아서는 마름모 내지 북서-남동 방향이 긴 장방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성벽 길이는 2,285m에 달하며 내부 면적은 216,000㎡ 이다. 남쪽 성벽과 북쪽 성벽 사이의 직선거리는 최대 730m이고,

동쪽 성벽과 서쪽 성벽 사이의 가장 먼 거리는 540m이다.

 

이밖에 동문과 북문 사이의 성벽과 연접하여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또 하나의 능선에 길이 약 270m의 외성이 축조되었는데

내부 면적이 약 80,000㎡ 에 달한다.

 

토성의 바깥으로는 멀리 남한산성 부근에서 발원한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남쪽 부근에서 토성의 동벽을 따라 북쪽으로 흐른 다음,

다시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 약 1km 밖에 있는 한강 본류에 합류함으로써 자연적인 해자가 되었다. 몽촌토성에서 남쪽으로 약 1~2km

거리 이내에 방이동.가락동.석촌동고분군이 위치한다.

 

성벽은 자연구릉 가운데 그 높이가 다른 지점보다 낮은 부분만을 판축하여 연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서쪽.남쪽.북쪽의 성벽은

구릉의 정상부를 바깥쪽에서 덧쌓기도 하였다. 성벽을 쌓을 때 점토*粘土),사질토(沙質土),모래 등 여러 종류의 흙을 이용하였는데, 방수

효과를 기대한 것인지 군데군데 검은색 점토와 석회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덧쌓거나 다시 쌀은 것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 북문지와

동쪽 성벽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으므로 성벽의 높이는 지점마다 다르다. 지금의 지표면을 기준으로 할 때 10~13m인 곳이 있는가 하면,

바깥에서 보아 40m를 넘는 곳도 있다.

 

토성안의 성벽 네 귀퉁이 정상부에서는 가각 3~5m 높이로 만든 4개의 토단이 확인되었다. 서북쪽의 토단은 표고 44.8m의 봉우리로서,

이곳에 올라서면 토성 내의 북반부는 물론 풍납동.성내동.잠실.석촌동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남쪽의 토단은 표고 37.5m 인데,

생토암반층 위에 30cm 가까이 진흙을 깔고 그 위로 적갈색 사질토를 켜켜이 쌓은 흔적이 역력하다. 서남쪽의 토단은 표고  37.3m로서,

이곳에 올라서면 고분군이 위치한 방이동.가락동.석촌동 일대가 정말 지척임을 실감케 한다.

 

 

2012년 개관을 목표로 현재 건립중인(건물은 모두 완공되었다) 한성백제박물관 옥상층에서 바라본 몽촌토성

 

 

종일토록 안개속에 갇혀 있던 서울의 하늘에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마치 달처럼 하얀 해가 보인다.

 

 

몽촌역사관 관람을 끝으로 답사 일정 모두 마치고 '서울 답사 인증샷' 찍어주심. (사진출처, 이신효 선생님)

 

지난주에 풍납토성 발굴을 직접 담당하셨던 신희권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떠난터라 이번 '백제 한성 유적 답사'는 그 기대와 기다림 또한

여느때보다도 컸다.  안내를 맡아주신 김기섭 선생님의 열성적인 현장강의와 이번 문화강좌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많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왕궁리유적전시관 이신효 선생님의 정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  참고자료 : 왕궁리유적전시관 발행 <고대국가의 도성과 왕궁>

                   서울특별시 발행 <몽촌역사관유물집>

 

 

'옛날부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경주 여행스케치  (0) 2012.04.02
무왕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 2  (0) 2011.11.27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풍탁전>   (0) 2010.10.30
아이들의 그림세계  (0) 2010.07.19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0) 2010.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