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피서지에서

연이♥ 2010. 8. 24. 11:07

 

두연군에게 주어진 이틀간의 짧은 방학을 맞아 뒤늦은 피서를 다녀왔다.

이틀분의 식량과 땔감과 옷가지들을 챙겨 집을 나선지 30분이 지나도록 어디로 갈 것인지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지만

차가 가고 있는 방향은 분명 우리가족 피서지 영순위 지리산이다.

 

다만, 지리산의 청학동,쌍계사,피아골,뱀사골,백무동,칠선계곡,대원사 등등의 수많은 계곡 가운데 어느골로 들어야 할지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고 하는게 옳겠다.  지난해 여름, 무주에서의 하룻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두연군은 시종일관 무주행을

주장했지만 차는 이미 지리산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 어이하랴. 두연군에게 무주는 알프스를 연상하게 할만큼 공기 맑고 자연 풍광이

무척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매일 밤늦게까지 책상에만 앉아 있던 연이형제가 오랜만에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하려니

멀미가 난다고 해서 길가에 정자가 있길래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정자 앞에는 '오수의견상' 이 세워져 있다.  

불이 난줄도 모르고 술에 취해 낮잠을 자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물을 묻혀와 불을 끈 후에

지쳐 쓰러진 개의 충정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다.

 

차에서 내릴때만 해도 숨이 턱 막힐만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는데 정자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주변에 축사가 있어 바람에 묻어온 향기가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정자에 앉아 잠시 쉬면서 바람을

맞다보니 그제서야 휴가를 떠난 기분이 든다. 

 

시원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한 시간이 넘도록 결정하지 못했던 피서지를 백무동으로 최종 합의했다.

 

    

 

팔팔고속도로 개통을 기념해 지리산 휴게소에 세워진 준공탑...

나는 이 준공탑을 보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뽀족한 첨탑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했던 생각밖에 안난다.

"저 놈의 준공탑만 보면 피가 끓는다"고 했던가? ㅎ 

 

 

 

 

다른 사람의 감상에 쉽게 동화되어 버리는 나와는 달리 개성이 뚜렷한 두연군은 멋진데 왜그러냐며 준공탑을 향해 껑충껑충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그 뒤를 장금이 녀석도 신나게 따라 올라가더니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기까지 한다.

 

 

 

중간중간 휴게소에도 들르고 점심으로 짜장면도 사먹고 했더니 백무동까지 가는데 세 시간이 걸렸다.

장터목과 세석평전으로 길이 나뉘는 지점에 탐방지원센타가 있는데(예전 같으면 매표소다) 등산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산책이라도 할겸 탐방센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느티나무 산장'을 숙소로 잡았다.

 

휴가철 성수기가 지난터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맘에 드는 숙소를 구할 수 있음이 무엇보다 다행이다.

창을 열면 바로 옆으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정말 상쾌하고 시원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자며 모두들 나왔는데 군데군데 걸어놓은 팻말에 섬뜩한 문구가 씌어있다.

지난달 말에 바로 이곳에서 고무보트가 뒤집혀 40대 남자 한 명이 익사를 했다고 한다.

 

안그래도 며칠 동안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나 물살이 거센터라 어차피 물놀이는 못하고 발이나 담그고 있어야겠다

생각했으면서도 불과 얼마전에 사망사고가 있었다는 문구를 보니 바위에 올라가는 것조차 겁이 나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바위에 걸터 앉아 발을 담그고 있을 정도의 얕은 물에서 장금이만 신나게 수영을 한다.

사실 장금이는 물을 싫어하지만 장금이녀석 수영하는걸 보는게 즐거워서 자꾸만 물속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우레와 같은 계곡의 물소리, 밤늦도록 들려오는 젊은 친구들의 함성소리, 작은 창문 하나만을 열었을 뿐인데도

추위가 느껴질만큼 서늘했던 지리산의 밤공기를 꿈처럼 느끼며 피서지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계곡에 아침 햇살이

비칠 무렵에서야 잠이 깼다.

 

새벽에 일어나 얼마전에 국가 명승지로 지정이 된 한신계곡을 탐방하려고 했는데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산이 깊어 계곡까지 아침햇살이 내려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리다보니 해가 뜬줄도 모르고 잠을 잔 모양이다.

늦었지만 두연군과 한신계곡 탐방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가벼운 아침산책을 했다.

탐방로에는 주말을 맞아 천왕봉에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 산행을 하고 있었다.

 

수능일까지 100일도 남지 않았기에 연이형제 모두 마음이 많이 조급해진 상태에서 이틀간의 휴가를 떠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더위에 지친 그네들의 몸과 마음에 잠시의 휴식과 자연의 맑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고픈 생각에 무조건 떠날것을 종용했다.

 

휴가는 짧고 다시 시작된 숨막히는 일상,

밤늦게 집에 돌아온 형제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밤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대화하는 모습을보니 피서지에서

조금이나마 힘을 얻어온듯해 괜시리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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