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사랑이면

연이♥ 2008. 11. 12. 15:49

  

 

 

 

 한 일본 기자가 질문했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입니까?"

늘 받던 질문이어서 나는 평소대로 대답했다.

"조르지 아마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윌리엄 블레이크, 헨리 밀러입니다."

통역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헨리 밀러요?"

 

 그러나 그녀는 이내 질문을 던지는 건 자신의 본분이 아님을 깨닫고 통역을 계속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나는 그녀에게 내 대답에 왜 그렇게 놀랐느냐고 물었다.

혹시 헨리 밀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가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냐고.

어쨌든 그는 내게 거대한 세상을 열어준 사람이고, 그의 작품에는 현대문학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에너지와 생명력이 담겨있다.

 

"헨리 밀러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걸요."

통역자가 대답했다.  "그가 일본 여자와 결혼했던 건 아시나요?"

알다 뿐인가.  나는 팬으로서 한 작가와 그의 삶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게

결코 부끄러운 태도라고 생각지 않는다.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나는 조르지 아마두를 

만나겠다는 일념만으로 도서전에 간 적도 있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나고자 마흔여덟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간 적도 있다(그 만남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건 순전히 내 탓이다.  막상 그를 만

나자 얼어붙어서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뉴욕에 갔을 때는 존 레넌 집의 초인종을 누른 적도

있다(건물 경비는 메모를 남기면 전해주겠다고 하면서 존 레넌이 전화를 해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심지어 헨리 밀러를 찾아 빅서에 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여행 경비를

다 모으기도 전에 밀러는 세상을 떠났다.

 

"그 일본 여자 이름은 호키지요."

내가 으스대며 말했다.  "도쿄에 헨리 밀러 수채화 미술관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오늘 저녁에 그분을 한 번 만나보실래요?"

 

 뭐라고!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한때 함께 살았던 사람을 만나고 싶냐고?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불현듯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테고, 인터뷰 요청도 무수히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십 년 동안 헨리 밀러와 함께 산 사람이 아닌가.  그런 이가 고작 한 사람의

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을까.  하지만 통역자가 된다고 했으니 믿어보자.

일본 사람들은 허튼소리는 잘 안하니까.

 

 나는 그날 남은 시간 동안 대답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택시에 오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철로가 머리 바로 위를 가로지르는, 햇볕 들 일이 없을 듯한 어느 골목에 내렸다.

통역자는 낡은 건물 이층의 허름한 바를 가리켰다.

 

계단을 올라가니 바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 호키 밀러가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감추기 위해 그녀의 옛 남편에 대한 찬사를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았다.

호키는 작은 박물관으로 꾸며놓은 뒷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몇 장의 사진과

서명을 한 수채화 세 점, 헌사가 씌어진 책 한 권이 전부였다.

 

 그녀가 헨리 밀러를 만난 건 로스앤젤레스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던 때였다.

당시 호키는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어로 번안된 프랑스 샹송을 불렀고, 그곳에서 저녁을 먹던 밀러가 그녀의 샹송을

마음에 들어했다(그는 파리에서 오랜 기간을 살았다).  두 사람의 외출이 몇 차례 이어진 어느 날,

밀러는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우리가 앉아 있는 바에도 피아노가 있었다.

호키는 밀러와의 결혼생활중에 있었던 멋진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나이차로 인한 불화(밀러는

당시 쉰 살이 넘었고, 호키는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이였다)와 함께한 시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저작권을 포함한 전 재산은 밀러와 그의 전처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상속받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 세월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오래전 밀러와 처음 만난 그날, 그녀가 부른 샹송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엽>을 불렀다.  통역자와 나 역시 감동했다.

바와 피아노와 노래, 빈 공간에 울리는 일본 여인의 목소리.  호키는 대문호의 미망인이라면

으레 누리려 할 법한 것들에 초연했고, 밀러의 책이 벌어들이는 돈이나 국제적 명성을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유산을 두고 싸우는 건 의미가 없었어요.  사랑으로 충분하니까요."

 헤어지면서, 우리의 속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믿는다.

그녀에게서는 어떤 비통함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랬다.  사랑이면 충분했다.

 

 

                                                  -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가운데 '사랑, 그것이면 충분하다'  -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그런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 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 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에는 시를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이생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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