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고전 산문 산책

연이♥ 2008. 9. 12. 11:24

 

 

 

 

 

 

추석연휴를 하루 앞둔 오늘,

출근은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괜시리 들떠 땡땡이를 치고 있다.

 

명절에 시댁에 갈때면 꼭 챙겨가는 두 가지가 있다.

앞치마와 읽을거리 한 권,

 

남편은 위로 누나가 둘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한 명 있었지만 시동생이 서른 중반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운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지금은 막내 아닌 막내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보니 명절음식 장만도 시어머님과 나

둘이서 해야하고, 무엇보다 명절이지만 우리가족만이 시댁에서 보내는 하룻밤이 너무 심심하다.

 

그리하여 내겐 명절 전야에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주방에서 한 권의 책을 읽는 즐거움이 크다.

해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님께 용돈은 얼마로 할 것인지, 추석 선물은 뭘로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

못지않게 음식장만 끝내놓고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또한 즐거운 고민 가운데 하나다.

 

이번 추석에 읽을 거리로 휴머니스트에서 펴내고 안대회 선생이 지은『고전 산문 산책』를 골랐다.

우리 고전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교산 허균'을 시작으로 고문을 탈피하고 새로운 문체를 시도했던

조선후기의 뛰어난 문장가 23명의 산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당시에는 '소품문'이라 해서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고문의 경직되고 틀에 박힌

문체를 거부한채,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고자 했던 조선후기 트인 문장가들의 주옥 같은 

산문과의 만남은 '내가 내게로 보내는' 이번 추석 최고의 선물이 될 것 같다.

 

 

 

 

   

 

 

 

본문 가운데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 서문을 올려본다.

<도문대작>은 허균이 1611년에 귀양지인 전라도 함열(익산)에서 쓴 음식에 관한 저작이다.

 

 

우리 집이 비록 한미하고 가난하지만,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각 지방의 특별한 음식을 예물로 보내주는 자들이 많아서,

어릴 적에는 진귀한 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었다.  장성해서는 부잣집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또 갖가지 산해진미를 맛볼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북쪽지방으로 피난하였다가 강릉의 외가로 갔기에 낯선 지방의 기이한 음식을 두루 맛볼

기회를 얻었다.  베옷을 벗고 벼슬하기 시작한 뒤로는 남과 북의 임지로 떠돌아다니면서 더더욱 남들이 해주는 음식을 입에 올리게

되었다.  그 덕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음식이라면 조금씩 맛보지 않은 것이 없고, 좋다는 음식이라면 먹어 보지 않은 것이

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성이요, 그 가운데 식욕은 특히 목숨과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현들께서 식욕을 천하다고

하신 말씀은,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여 이익에 몸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켜 말했을 뿐이다.  성인께서 한 번이라도 음식 먹기를

그만 두고 언급을 회피한 일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여덟 가지 빼어난 음식이 무슨 이유로 예로 적은 경서에 기록되었고,

맹자가 물고기와 곰발바닥 요리를 구분하여 말했으랴?

 

나는 예전에 하증이 쓴 <식경食經>과 서공(위거원)이 쓴 <식단食單>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천하의 온갖 음식을 다

거두어서 풍성하고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제시한 음식의 종류가 대단히 많아서 일만의 단위로 헤아려야

할 지경이다.  그러나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그저 번갈아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서 눈과 귀를 현란하게 만든 자료에 불과하다.

 

조선이 비록 외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드높은 산지로 중국과 막혀 있다.  따라서 생산되는 물산이 풍부

하고 넉넉하다.  만약 하씨와 위씨, 두 분의 사례를 적용해 명칭을 바꾸어 구별하기로 한다면, 얼추 일만의 단위로 음식의 가짓수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거처를 옮기고부터는, 쌀겨나 싸라기조차 제대로 댈 형편이 못 되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라곤 썩은

뱀장어와 비린내 풍기는 물고기, 쇠비름과 미나리에 불과하였다.  그 조차도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하여 밤새 뱃속이 비어 있었

다.  산해진미를 입에 물리도록 먹어서, 물리치고 손도 대지 않던 옛날의 먹거리를 떠올리고 언제나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곤 하였

다.  이제는 아무리 다시 먹고 싶어도 하늘에 사는 서왕모의 천도복숭아인 양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내가 동방삭이 아니고보니

무슨 수로 그 복숭아를 몰래 따겠는가?

 

마침내 그 음식들을 분류하여 기록하고 틈이 날 때마다 살펴봄으로써 고기 한 점 먹은 셈 치기로 하였다.  작업을 마치고나서,

책의 이름을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입맛을 다신다"는 뜻으로 <도문대작>이라 하였다.  세상의 벼슬 높은 자들은 온갖 음식

사치를 다 누리면서 하늘이 낸 물건을 절제함 없이 마구 쓴다.  나는 내 경우처럼 영화와 부귀란 언제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경게

하고자 한다.

 

신해년(1611) 4월 21일, 성성거사惺惺居士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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