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뺨 맞은 원님

연이♥ 2007. 6. 29. 15:34

 

  전라도의 한 원圓이 너무 무섭게 자기 고을을 다스렸다.  

조금만 잘못해도 어찌나 가혹하게 벌을 내리는지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

아침 저녁으로 안심하기 어려워 가슴을 죄고 겨우 숨을 쉬었으며 서 있을 때도 살얼음을 밟듯 하였다. 

 

하루는 아전 가운데 우두머리인 이방이 다른 아전들을 모아 놓고 의논을 하였다.

"우리 원님은 일은 서툴게 하면서 형벌만 가혹하구려.  하루 일하는 것이 그대로 하루 잘못이 되고 있소.  만약 이대로 몇 년이

지난다면 비단 우리만 결딴나는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거의 흩어져 우리 고을이 거지 신세가 되고 말 것이오.  이러고서 어떻게

고을이 남아나겠소?"

"그렇기는 하옵니다만 그럼 어떻게....."

"원님을 우리 고을에서 하루라도 빨리 쫓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앉아 있던 아전 가운데 한 사람이 꾀를 내놓았다.

"이리이리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모두 찬성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릎을 치며 자못 진지한 투로 말하였다.

"허허, 그 꾀가 아주 용하구먼."

 

드디어 약속을 하고 왁자지껄 떠들다가 헤어졌다.  과연 이방과 다른 아전들은 어떤 꾀를 낸 것일까?

 

원이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 중에 일을 마치고, 마침 별다른 일이 없어 책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 때였다.  혼자 있는 원 앞으로 어린 통인 녀석이 가까이 다가섰다.  뜻밖에도 녀석은 손을 들어 냅다 원의 뺨을 갈겼다.

원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리둥절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원은 분이 머리끝까지 뻗쳐 다른 통인들을 불러 댔다.

"이리 오너라. 게 누구 없느냐? 저런 발칙한 놈을 당장 잡아들여라.  감히 고을 원의 뺨을 때리다니."

 

귀가 째지는 듯한 호령에 뛰어들어온 통인들은 모두 멀뚱멀뚱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면서 누구도 원의 명령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원은 다시 통인보다 높은 아전들을 불러들여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입을 가리고 실실 웃으며 말하였다.

"원님이 실성하신 것이 아닐까?  아무렴 어린 통인 녀석이 원님 뺨을 칠 리가 있나?"

 

미칠 노릇이었다.  사실 원은 본디 조급한 성미를 가진 사람인데 속에서 분노가 복받치자 참을 수 없어 창문을 밀치고 책상을

박차 버렸다.  또 고함을 지르며 야단을 쳐 댔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이 미친 사람 같았다.  

아전들의 꾀는 바로 이것이었다.  원이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통인들은 얼른 원의 숙소로 달려가 부인과 아들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원님께서 갑자기 병환이 나셔서 가만 계시지 못하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떠들고 돌아다니십니다.  자칫 큰일날 듯싶습니다."

 

아들과 다른 손님들이 황급히 나와 보았다.  과연 일어섰다 앉았다 불안해하고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는가 하면 발로 창문을

차기도 하였다.  이 또한 누가 보더라도 미친 사람의 소행이었다.

 

아들과 손님들이 오는 것을 보고 원은 이제야 자기 말을 듣겠다 싶었는지 그간 있었던 일을 죄다 일렀다.  어린 통인이 자기 뺨을

때린 일과 아전들이 명령을 어긴 일 등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서 말의 앞뒤가 잘 맞지 않는데다, 마음에 불이 일어서 눈이 벌겋게

뒤집히고 온몸이 땀에 젖고 입에는 거품을 잔뜩 물었다.

 

아들들이 보기에도 그 모습이 미친 병이 난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린 통인 녀석이 원의 뺨을 때리다니,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본 사람도 없고 상식으로 생각하여도 도저히 그럴 수 는 없었다.  아들 하나가 가까이 가서 조용히 아뢰었다.

"아버지, 편히 앉아 고정하시지요.  통인 아이들이 비록 모자라서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망정 어찌 뺨을 때리기야 하였겠습니까?

병환이 나신 듯하옵니다."

 

원은 믿었던 아들마저 그렇게 말하자 더욱 화를 이기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너희들 역시 통인 놈들과 한통속이로구나.  썩 물러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라."

 

아들은 곧 읍내의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하고 약을 서 보게 하였다.

그러나 원은,

"내가 무슨 병이 있다고 약을 쓰려 하느냐?"

하고 손을 내저으며 의원을 꾸짖고는 약을 물리쳤다.  그리고 하루 종일 길길이 날뛰었다.

 

아들들조차 미친 사람으로 쳐 버렸는데 누가 원의 말을 귀담아 듣겠는가?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그러하여 원은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진짜 미친 병이 들고 말 지경이었다.  읍내는 물론 시골 구석구석까지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라도 감사가 이 소문을 듣고 조사를 해보더니 원을 곧 파직하였다.  원은 할 수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에 전라도 감영에 들러 감사를 만났는데, 감사가 위로하며 말을 건넸다.

"몸에 병이 있으시다더니 이제 좀 어떠시오?"

"제가 참으로 병이 있었던 것이 아니올시다."

 

원은 억울하게 당한 일을 앞뒤 갖추어 하소연하려 하였다.  감사는 얼른 손을 저어 말을 막았다.

"병이 재발하는군.  급히 서둘러 떠나셔야겠소."

 

원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도 원은 그 고을 일만 생각하면 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엇었다.  그러다가 행여 그 일에 대해 말하려 하면

가족들은 곧 병이 재발하는 것으로 보고 의원을 부른다, 약을 짓는다 생야단을 했다.  그러니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원도 나이가 들고 그 일 또한 머나먼 옛날 일이 되었다.

이제는 말을 하더라도 병이 도진 것으로 보지 않으리라 싶었다.  그래서 원은 아들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옛날 그 고을에 있을 때 통인에게 뺨을 맞은 일을 너희는 아직도 내가 미쳐서 헛소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느냐?"

여러 아들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아버지의 그 증세가 한참 괜찮더니 오늘 또다시 나타나는구나.  이를 어찌한담."

 

아들들의 얼굴에는 근심하고 초조해하는 기색이 확 드러났다.  원은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렵겠다 생각하고는 껄껄 웃고 말았다.

그 후로는 죽을 때까지 분을 품고서도 그 일을 털어놓지 못하였다. ♣

 

 

 

 

                                                                        「재미있다 우리고전」중에서... / 창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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