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멋/ 피천득

연이♥ 2007. 5. 27. 14:38

  골프채를 휘두른 채 떠나가는 볼을 멀리 바라보는 포오즈, 바람에 날리는 스커어트, 이것은

멋진 모습이다.

 

  변두리를 톡톡 건드리며 오래 얼러 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두들기는 북채, 직성을 풀고는

마음 가라앉히며 미끄러지는 장삼 자락, 이것도 멋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진정한 멋은 시적 논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멋 속에는 스포오츠맨십 또는 페어플

레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어떤 테니스 시합에서 A선수가 받아야 할 인 사이드 볼이 심판의

오심으로 아웃으로 판정되었다.  관중들은 자기네 눈을 의심하였다.  잇달아 A선수가 서어브

를 들이게 되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더블 아웃을 내었다.  그때 그의 태

도는 참으로 멋있는 것이었다.

 

  저속한 교태를 연장시키느라고 춘향을 옥에서 하룻밤 더 재운 이몽룡은 멋없는 사나이었다.

무력한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루이사를 아내로 삼는 나폴레옹도 멋없는 속물이었다.  비록

많은 여자를 사랑했다 해서 비난을 받지만 1823년 이탈리아의 애국자들이 분열되었을 때

"나는 이탈리아 독립을 위하여 피를 흘리려 하였으나,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떠난다."라는

스테이트먼트를 발표하고 희랍으로 건너가 남의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재산과 목숨을

바친 영국 시인 바이런은 참으로 멋진 사나이였다.

 

  멋있는 사람은 가난하여도 궁상맞지 않고 인색하지 않다.  폐포파립을 걸치더라도 마음이

행운유수와 같으면 곧 멋이다.  멋은 허심하고 관대하며 여백의 미가 있다.  받는 것이 멋이

아니라 선뜻 내어 주는 것이 멋이다.  천금을 주고도 중국 소저의 정조를 범하지 아니한 통사

홍순언은 우리 나라의 멋있는 사나이였다.

 

  논개와 계월향은 멋진 여성이었다.  자유와 민족을 위하여 청춘을 버리는 것은 멋있는 일

이다.  그러나 황진이도 멋있는 여자다.  누구나 큰 것만을 위하여 살 수는 없다.  인생은 오

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였다.  키가 크고 날씬한 젊은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바른손으로 물동

이 전면에서 흐르는 물을 휘뿌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때 또 하나의 젊은 여인이 저 편

지름길로부터 나오더니 또아리를 머리에 얹으며 물동이를 받아 이려 하였다.  물동이를 인

먼저 여인은 나중 나온 여인의 머리에 놓은 또아리를 얼른 집어던지고 다시 손으로 동이에

흐르는 물을 쓸며 뒤도 아니 돌아보고 지름길로 걸어 들어갔다.  마중나왔던 여자는 웃으면서

또아리를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  이 두 여인은 동서가 아니면 아마 시누이 올케였을 것이다.

그들은 비너스와 사이키보다 멋이 있었다.  멋이 있는 사람은 멋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작고 이름지을 수 없는 멋 때문에 각박한 세상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바라다 보고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록과 꽃향기로 온 산하가 아름다움으로 넘쳐나는 오월에 한국 문학을 밝힌 큰 별

아동문학가 권정생님과 수필가 금아 피천득님께서 세상 소풍을 마치고 귀천 하셨다.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가신 권정생님과 서정적이면서 간결한 문체로 순수를

지향했던 피천득님의 아름다운 떠남을 기억하고자 한 편의 수필을 골라 보았다.

 

한 편의 수필을 통해서 작가에 대해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꾸고 실천하고자 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것이다.

 

피천득님의 수필 '멋'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조류를 따라잡기에 급급해 멋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들에게 진정한 멋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짧은 글이지만 선생이야말로 참으로

멋진 분임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님의 '인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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