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국보가 된 참기름병

연이♥ 2010. 6. 23. 18:03

 

 경기도 팔당에서 낚시로 생계를 꾸려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야말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수심 깊은 강 가운데로 나가, 낚싯대가 아니라 낚싯줄로만 팔뚝만 한

잉어나 숭어, 누치를 낚아 뜰망에 담아내는 견지낚시 기술을 가진 할아버지다.

 

 당시 한강에는 메기,붕어,잉어,누치 같은 물고기가 많아 실패나 얼레에 낚싯줄을 감아 고기를 낚는 견지낚시꾼들이 강마을에 모여살았다. 그렇게 잡은 민물고기는

황포돛배를 타고 팔당,양평,뚝섬의 낚시꾼 마을을 오가는 중간상인에게 넘겨져 서울로 팔려갔다.

 

 그러나 견지낚시로 민물고기나 건져올려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입을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봄이 되면 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참기름을 짜

살림에 보탰다.

 

 그렇게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인근 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박힌 채 살짝 고개를 내민 흰색 병을 발견했다. 뭔가 싶어 호미로 살살 흙을 걷어

냈더니 참기름을 담기에 안성맞춤인 목이 긴 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흙을 좀 더 걷어내자 비슷한 병이 무더기로 나왔는데, 더러는 깨진 것도 있었지만 온전

한 병도 수두룩했다.

 

 그곳이 바로 팔당 부근에 있던 조선시대 분원(分院,왕실용 도자기를 굽던 곳) 가마터였지만,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할머니는 병이 필요할 때마다 그곳에 가서 목

이 긴 병을 주워다 요긴하게 썼다. 할머니는 가을에 직접 짠 참기름을 그 목이 긴 흰 병에 담아 민물고기를 사가는 중간상인에게 1원씩 받고 팔았다.

 

 중간상인들의 황포돛배가 노량진 포구에 도착하자 장사치들이 배에 올라와 민물고기와 산나물을 골랐고, 광주리 행상 개성댁도 잉어 몇 마리와 참기름을 한 병 샀

다.

 

개성댁은 잉어와 참기름병이 담긴 광주리를 이고 황금정에 있는 일본인 단골손님 집으로 갔고 참기름 값으로 4원을 불렀다.

"시골에서 막 짜온 진짜 참기름이라 좀 비싸요."

 

개성댁은 노량진에서 2원에 샀으므로 안주인이 1원쯤 깎겠다면 깎아줄 생각도 있었다.

"그러게, 좀 비싸네요. 그럼 병도 주세요. 병이 예쁘게 생겼네."

"이거, 비싼 병이에요. 막병이 아니라니까! 그냥 줄 수는 없고, 1원은 내셔야 해."

 

 일본 사람이 탐내는 걸 보고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계산에 밝은 개성 출신다운 발상이었다. 안주인은 선선히 5원을 내주었고, 1원을 깎아주려다 오히려 1원을 더

받은 개성댁은 신이났다.

 

 참기름병이 범상치 않은 것 같아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른 안주인은, 옆 건물에서 골동품 상점을 하고 있는 남편 무라노를 부엌으로 데리고 왔다. 무라노는 감탄을 연

발하며 참기름병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대단히 독특한 백자예요. 조선 속담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가게를 드나들며 곁눈질로 익힌 안목이 대단합니다. 하하하!"

"이 병이 정말 가치가 있는 건가요?"

 

그녀는 남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지만, 살림을 하는 여인답게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부터 물었다.

"이 정도면 몇십 원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요, 하하하!"

 

 무라노가 이 병을 입수한 건 1920년 초. 그때만 해도 일본인들은 고려청자만 높이 평가했을 뿐, 조선시대 백자는 별로 쳐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도자기를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았소?"

출토 경위를 알고 모름에 따라 도자기의 가치는 많이 달라진다.

"그런 것도 알아야 하나요?"

순간 무라노는 실망스러웠지만, 아내를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알면 좋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아! 그 아주머니가 개성댁이니까, 개성에서 갖고 오지 않았을까요?"

"하긴, 요즘 고려청자가 모두 개성에서 나오니까, 백자도 거기서 나올 수 있겠구려. 그럼 이건 개성에서 나온 백자라고 해서 판 후, 값의 절반은 당신에게 주리다."

 

 사실 백자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백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출토지를 모르는 도자는 전부 개성 부근에서 나왔다고 했다.

 

 며칠 후, 무라노는 이 백자를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겼다. 5원을 주고 산 참기름병을 60원에 판 무라노는, 약속대로 아내에게 30원을 주었다. 며칠 새 서

울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값을 번 부부는 기분이 좋아 남산 밑에 있는 음식점에서 외식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백자가 스미이 다쓰오라는 수집가에게 600원에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무라노는 아내에게는 차마 그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했다.

 

 스미이는 이 백자를 계속 갖고 있다가, 1932년 일본으로 귀국하기 얼마전에 자신의 수장품 180점을 경성 구락부 경매에 출품하면서 함께 내놨고, 그 경매에서 모리

고이치라는 수집가에게 3천원에 낙찰되었다.

 

 모리 고이치는 1908년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들어온 금융 전문가로, 탁지부(度支部)에서 만든 농공은행에서 근무했다. 얼마 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면서

직장을 잃었지만,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일본 은행에 근무하면서, 우리의 옛 서화와 도자기를 많이 모았다.  그러나 재력이 있는 사업가가 아니었기에, 값이

비싼 고려청자는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조선백자를 중점적으로 수집했다. 다른 수집가들이 백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모았기 때문에, 그

의 수장품 중에는 뛰어난 백자가 많았다. 더욱이 그는 사들이기만 했을 뿐 그동안 한 점도 팔지 않아, 조선백자 중 명품을 많이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 대수장가가 1936년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이 슬픔을 어느정도 추스르자, 경성 미술구락부 사장 사사키는 신보와 아마이케 등 몇몇 골동품상들로 세화인을 구

성해 모리 고이치의 미망인과 큰아들을 만났다. 그 결과 유품 200점의 전시를 11월 20~21일에, 경매는 22일에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모리 고이치 유품 경매 주최자 중 한 명이 된 신보는 도록을 만들기 위해 촬영한 사진 200장을 들고 명동의 일식집 기쿠스이에서 전형필을 만났다.  신보와 머리를

맞대고 응찰할 작품을 고르던 전형필이 그 '개성 백자'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 높이 41.7cm, 18세기 후기, 국보제294호, 간송미술관 소장

 

 

 들에 핀 국화 위로 나비가 난다.

외로움이 깊어서 이토록 흰색인가,

 늦가을 바람이 그리워 노란색인가,

화려하고 싶어 분홍색인가,

들국화가 나비를 불렀는가,

가 들국화의 아름다움을 찾아오는가,

초충도의 화폭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으리라.

함초롬히 솟아오른 난 이파리,

가을바람에 흩날리는가,

쓸쓸함을 이기지 못해 산그늘에 얼굴 감추고 눈물 흘리는가.

들국화 향기가 허공에 흩날린다.

 

 

 

"신보 선생, 이 백자를 직접 보셨소?"

"간송, 저도 그것을 추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출품작 중 가장 뛰어난 것 같습니다. 높이가 41센티미터인데 국화와 나비는 별도로 만들어 양각으

로 붙였고, 풀잎은 청화 안료, 국화는 진사와 철채를 입혔습니다. 이렇게 양각처리를 하고 세 가지 색을 입힌 백자는 저도 처음이고, 그래서 이 백자는 경합이 치열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상가를 얼마로 책정하셨소?"

 

 당시 경매에서 예상가는 출품자에게 약속해준 최저 가격이었다. 만일 그 가격에도 낙찰되지 않으면 , 세화인들이 그 차액을 물어주어야 했다.

"6천 원으로 책정했지만, 이번 경매에 관심이 있는 수집가가 많아 더 올라갈 것 같습니다."

 

 사실이었다. 모리 고이치의 수장품이 워낙 좋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경매를 기다리는 수집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신보의 말에 의하면, 원산에서 어장을 하

면서 백자를 열심히 모으는 미요시, 인천에서 정미소를 열어 거부가 된 스즈시게, 역시 큰 부자인 성환농장 주인 아카보시, 저축은행 전무 시라이시 간키치, 전형

필을 찾아와 천학매병을 양보해달라고 했던 오사카의 무라카미,  전형필에게 석탑과 혜원의 풍속화첩을 판 야마나카 상회 사장 야마나카 등 기라성 같은 수집가

들이 참가하는 큰 경매였다.

 

 이 정도 수집가들과 경쟁이 붙는다면 '예상가 6천 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전형필은 머릿속으로 현재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계산했다. 박물관 공사가 중반

으로 접어들어 계속 큰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계산을 끝낸 전형필은 나머지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현재 심사정의 매가 꿩을 사냥하는 그림과 겸

재 정선의 폭포 그림 사진도 옆으로 빼놓았다.

 

 전형필은 경매가 열리기 하루 전인 1936년 11월 21일, 소화통(지금의 퇴계로)에 있는 경성 미술구락부 전시장에서 백자를 직접 확인한 후 꼭 구입해야겠다는 결

심을 굳혔다. 그리고 다른 때와는 달리 직접 경매에 참가했다.  백자보다 먼저 경매에 붙여지는 겸재와 현재의 그림을 얼마에 낙찰받는지에 따라 백자 입찰 가능

가격이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중략)

 

 경매가 반 정도 진행되자 휴식시간이 선포되었고, 경매장 입구의 탁자에 간단한 안주와 정종이 차려졌다. 참가자들은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라는 듯, 정종을 호

기롭게 들이켜거나 줄담배를 피웠다.

 

 2부 경매가 시작되고 얼마 후, 마침내 그 백자가 탁자 위에 올려졌다.

"시작가 부르세요!"

 

 경매사가 외첬다. 당시 경매는 지금처럼 출발가를 정해놓지 않고 참가자가 시작가를 부르게 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시작하게 해서 경쟁을 유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가끔 이런 '묵시적인 약속'을 깨고 엄청나게 높은 시작가를 불러 다른 참가자들의 기를 꺾고 경매를 재미없게 만드는 이도 있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시작가로 500원을 부르자, 곧 1천 원이 나왔고, 순식간에 3천 원까지 올라갔다. 그때 무라카미가 '5천 원'을 불렀다. 갑자기 2천원이 뛰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시 '6천'이 나오고 '7천'이 나왔다. 경매사가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자 신보가 '8천'을 불렀다. 경매사가 무라카미를 바라봤지만 그는 고려청자

가 아닌 조선백자에는 더 이상의 돈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자, 8천 원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8천 원........"

 

 경매사가 '8천 원'을 세 번 외칠 동안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입찰자가 없으면 경매봉이 낙찰을 알리게 된다. 경매사는 두 번째는 조금 천천히 외치면서 장내를 둘

러보았다. 낙찰가가 높을수록 경매 수수료도 올라가기 때문에 더 많은 입찰을 유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출품자와 입찰자는 모두 숨을 죽이게 된다.

그런데........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9천 원!"

 참가자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야마나카였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오른손을 살짝 들고 있었다.

 

"1만 원!"

 참가자들이 고개를 돌려 바로 앉기도 전에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숙고는 하지만 장고는 하지 않는 전형필의 대리인 신보의 목소리였다. 경매장에서는 큰 목소리

로 신속하고 단호하게 다음 가격을 불러야 상대가 위축된다. 그래서 신보는 속사포처럼 빠른 속도로 다음 가격을 부른 것이다.

 

"1만 500원!"

 야마나카가 500원밖에 올리지 않자 전형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1만 1천 원!"

 

 이때부터 입찰가는 500원 단위로 올라갔다. 장내는 백자 경매 사상 초유의 가격 경신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1만 4천 500원!"

"1만 5천 원!"

 

 신보는 전형필이 정해준 상한가 1만 5천 원을 부른 후 전형필을 바라보았다. 전형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두 번 더 응찰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야마나카도 최고 가격을 1만 5천 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신보가 저렇게 쉴 새 없이 다음 가격을 부르면서 쫓아오는 걸로 봐서 전형필의 승부 가격이 자신이 생각

한 최고 가격보다 더 높을 것 같았다. 야마나카는 수장가가 아니라 골동품상이었기 때문에, 이득을 남기면서 되팔 수 있다고 판단되는 최고 가격을 정하면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야카나카는 노회한 골동품상답게 더 이상 가격을 부르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중략)

 

 훗날 조선백자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 골동품상과 수장가들이 몇 차례에 걸쳐 거액을 제시했지만 전형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광복 후 보물제241호로 지정

었다가 국보제294호로 재지정되었으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영사에서 펴내고, 이충렬 지음, <간송 전형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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