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영화

거지 이야기

연이♥ 2007. 11. 9. 15:44

 

 

사진 :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앞

  

 

망태 거지는 성이 홍洪이고 전주全州에서 살던 거지다. 

자기가 망태 거지라고 했는데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그는 키가 7척이다.

차가운 옥처럼 깨끗하며 결이 곱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다.

누가 나이를 물으면 스무 살이라고 하고 다음 해에 물어도 똑같이 대답한다.

10년 뒤에 물어도 마찬가지다.  망태 거지의 모습은 늙지도 빛을 잃지도 않는다.

 

그는 언제나 낡은 옷 한 벌을 입고 나막신을 끌고서 서울로 다니며 구걸한다.

얻은 것이 많으면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준다. 평생토록 사람들과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집 안에서 잔 적도 없다.

 

망태 거지는 많이 먹는다.

쌀 여덟 말로 밥을 지어 다 먹어도 배부르다 하지 않고 술을 여러 동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또 몇 달 동안 먹지 않아도 배고프다 하지 않는다.

 

망태 거지는 바둑을 잘 둔다.

하지만 겨루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서울 사대부들이 그를 불러 에워싼 가운데 그중 가장 잘 두는 사람과 겨루게 하면 언제나 한 수 차이로 이긴다.

가장 못하는 사람과 겨루어도 한 수 차이로 이긴다.  당시 바둑에서 한 수 차이의 승부를 '망태 거지의 바둑 두기'라고 했다.

 

망태 거지는 추위에 강하다.

눈 내리는 한겨울에 바람이 몰아쳐 새들이 얼어 죽어도 망태 거지는 끄떡없다.

맨몸으로 서 있기도 하고 꽁꽁 언 시내에 눕기도 한다.  사흘이고 닷새고 자다가 일어나면 땀이 흘러 발꿈치까지 축축하다.

사람들이 옷을 주어도 받지 않는데 그래도 억지로 주면 겨우 입었다가 시장에 가서 다른 거지에게 준다.

 

충익공忠翼公 원두표元斗杓가 전주 부윤이 되었을 때 그를 불러서 후하게 예우해 준 일이 있다.

망태 거지는 밥은 같이 먹었지만 말을 걸면 사양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디론가 가 버렸다.

수십 년 뒤, 어떤 사람이 관서關西로 가다가 그를 만났는데 예전과 똑같았다고 한다.

 

 글 : 『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본문 가운데 김려의 <삭낭자 전> / 최기숙 지음 / 서해문집

 

 

 

 

책 속에 등장한 망태 거지는 진정 낭만거지로세!

 

나 어릴적 살던 동네에 단군 할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솟을대문 아래에 거지가 살았었다

낮동안에 거지는 구걸을 하기 위해 동네를 벗어나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다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어스름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사당 대문밑으로 찾아 들었다

 

대개 사람들은 거지를 보면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는다

먼 발치에서 이미 상대편이 누구인지 간파 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지나치는 이가 없는것처럼 자연스레 외면하기 일쑤다

 

나 어릴적에도 그랬었다

한 번도 우리동네 거지와 눈을 마주쳐 본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 생김새와 뒷태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에 세모골로 찌그러진 눈 그리고 텁수룩한 수염과 온갖 천조가리들을 덕지덕지 꿰매고 묶어서

옷을 입었다기 보다는 끌고다닌다는 표현이 적합할만큼 무거워 보이는 옷을 입고 헤진 검정구두를 신고 걸어가던 뒷

모습을 말이다

 

그 시절에 기억에 남는 또 한 명의 거지가 있다

여자거지인 그녀의 옷차림 역시 거지들만의 고유의상이랄 수 있는 무거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자갈길이 울퉁불퉁한 신작로에 앉아서 큰일을 보곤 했었다

그럴때면 아이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거지에게 자갈돌을 주워서 던지고는 내빼곤 했다

어른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자식이 죽는 바람에 여자가 미쳐서 거지가 되어 떠돈다고 했다

 

요즘에도 거지가 있다

사무실 근처에 교회 소유의 공터가 있었는데 10년전쯤에 그곳 언덕에 거지가 둥지를 틀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언덕을 힐끗거려보면 거지는 버너에 불을 켜고 무언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는 사무실 대장이 거지에게 놀러가 말을 걸었더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모르는게 없더란다

이후 대장은 심심하면 한 번씩 거지에게 찾아가 놀다 오곤 했는데 교회에서 공터에 새 건물을 짓는 바람에

거지의 보금자리가 사라져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퇴근길에 가끔 아파트 근처에서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여전히 한 눈에 거지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두툼한 옷차림을 한 머리 허연 할머니 거지가 나와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걸 종종 목격한다

옷에 컵이며 자잘한 세간들을 달고 있으면서도 보조가방 하나를 들고 다니는 할머니 거지는 내가

굳이 시선을 피할 필요가 없는 것이 늘 뭔가를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걷기에 나와 눈이 마주칠 일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존재이다

성선설 성악설을 떠나서 사람은 누구나 한 개인으로 보면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자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고 타인에게도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엄연히 세상은 천한 사람과 귀한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가운데 거지는 천하고 귀하고를 떠나 그 존재 자체를 무시 당하기가 일쑤다

버젓이 곁에 지나가는데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시선을 너무도 자연스레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지들 입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진다

누군가가 앞에 오더라도 애써 시선 처리를 할 필요없이 그냥 똑 바로 쳐다보아도 눈이 마주칠 일이 없을테니 말이다

고로 거지들은 세상을 모든 인간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살필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랬다

세상이 그들을 버린게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버린거라고...

 

 

 

 

 

 

 

 

음악 : 벙어리 바이올린/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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